김하성, 경기 중 견제사 당한 이정후 엉덩이 톡 치며 긴장 풀어주기도
이정후는 3월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개막전에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 출장하면서 한국인 선수로는 27번째, 타자로는 12번째 MLB에 데뷔하는 선수로 기록됐다.
이 개막전이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건 상대 팀에 친한 선배 김하성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정후는 자신의 MLB 데뷔전을 김하성과의 맞대결로 치렀고, 상대한 선발투수는 다르빗슈 유였다. 그리고 첫 타점을 뽑아낸 투수는 이정후처럼 이 경기에서 MLB 데뷔전을 가진 마쓰이 유키였다. 정말 풍성한 데뷔전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김하성과 이정후는 키움 히어로즈 출신이다. 소속팀에서 유격수와 중견수로 자리매김하며 MLB에서 만나는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이 쏠린다.
이정후한테 잊지 못할 ‘3월 29일’의 데뷔전을 풀어본다.
6회말 이닝이 끝나자 공수교대를 위해 외야에 있던 이정후가 더그아웃을 향해 뛰어온다. 그 순간 6회 볼넷으로 출루했다가 2루 도루를 성공했던 김하성이 진루하지 못한 채 이닝이 마무리되자 수비를 위해 잠시 기다리다 뛰어오는 이정후를 기다린다. 김하성은 뛰어가는 이정후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친다. 이유가 있었다. 김하성은 5회 안타를 치고 견제사를 당한 이정후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데뷔전에서 기분 좋게 데뷔 첫 안타를 만들어낸 이정후가 1루에서 도루하려다 견제사 당하는 장면은 김하성한테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생각한 말이 “신경쓰지 마”였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긴장하고 있을 후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름 신경을 써서 전한 선배의 메시지였다.
3월 29일(한국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의 펫코파크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샌디에이고 홈 개막전 상대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이정후는 MLB 데뷔전이 열리기 전날인 28일 선수들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샌디에이고에 도착해선 가장 먼저 ‘하성이 형’을 만난다.
두 사람의 저녁 식사 메뉴는 ‘감자탕’이었다. 취재진이 밥값은 누가 계산했느냐고 묻자 이정후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하성이 형이요”라고 답한다. 그래서 “김하성이 샌프란시스코로 원정오면 그때는 누가 밥값을 내느냐”라고 질문하자 이정후는 바로 “하성이 형이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정후는 자신의 데뷔전 상대 팀에 김하성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어떤 형태로든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서울시리즈’를 마치고 피로 누적을 호소했던 김하성은 일주일가량 회복하는 시간을 갖고 좋은 컨디션으로 개막전을 맞이했다. 경기 전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하성은 이정후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았다.
“나는 (MLB) 데뷔전 때 대타로 나가 삼진을 당했던 것 같다. 반면에 (이)정후는 스프링캠프 때 잘했고, 팀에서도 기대치가 높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하면 충분히 잘할 것이다.”
김하성은 ‘서울시리즈’에서 7타수 무안타를 치고 왔다고 기록을 드러낸 다음 올 시즌에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매 경기에 집중하겠다는 각오도 덧붙였다.
이날 김하성은 5번 유격수로, 이정후는 1번 중견수로 선발 출장했다. 경기에 앞서 치른 개막전 세리머니에서 장내 아나운서는 먼저 원정 팀을 소개한다. 이정후는 밥 멜빈 감독 바로 다음에 호명돼 그라운드로 향했다. 원정 팀 선수들이 다 소개된 후에는 샌디에이고 선수단 소개가 시작됐다. 김하성의 이름이 불렸을 때 매니 마차도,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못지않은 함성이 펫코파크 스타디움에 울려 퍼진다.
키움 히어로즈 출신의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상대팀 선수로 마주한 장면은 현실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이정후가 상대할 샌디에이고의 선발 투수는 다르빗슈 유였다. 이정후와 다르빗슈 유는 지난해 3월 개최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맞붙어 2타수 1안타 1타점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이정후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다르빗슈와 관련된 질문을 받고 “내가 WBC에서 안타를 쳤다고 해서 오늘 칠 거란 보장이 없다. 그냥 잘 준비해서 내가 해온 걸 믿고 열심히 하겠다”라고 설명했다.
이정후는 1회초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3회 두 번째 타석에선 1사 2루 찬스에서 6구째 가운데로 몰리는 싱커를 때렸는데 이 타구가 1루수 크로넨워스 정면으로 향해 아웃이 됐다.
5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다시 다르빗슈를 상대한 이정후는 3-2 풀카운트에서 6구째 94.8마일(153km/h)의 싱커가 높게 들어온 것을 강타해 중견수 방면 안타를 만들어낸다. 이 안타는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데뷔 첫 안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쉬운 장면이 연출됐다. 후속 타자 호르헤 솔레어의 타석 때 1루에서 리드를 가져가던 이정후가 다르빗슈의 견제에 걸렸고, 런다운 이후 1루수 크로넨워스한테 태그되면서 그대로 이닝이 종료된 것이다.
7회초 이정후한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양 팀이 2-2 동점을 이룬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정후는 1사 1, 3루에서 샌디에이고의 좌완 마쓰이 유키를 상대한다. 마쓰이 유키도 이날 자신의 MLB 데뷔전이었다. 이정후는 2-2 카운트에서 5구 직구를 받아쳤고, 타구는 중견수 잭슨 메릴 쪽으로 향했다. 그 사이 3루에 있던 콘포토가 득점을 올린다. 이정후의 빅리그 데뷔 첫 타점이 나온 순간이다.
김하성은 이날 3타수 1안타 1득점 1볼넷 1도루를 기록했고 샌디에이고 타선은 7회 대거 4점을 내며 6-4 역전승을 거두며 홈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경기 후 만난 샌디에이고의 다르빗슈 유는 이정후와의 맞대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론 특별히 이정후란 선수를 의식하지 않았다. 개막전 상대팀의 1번 타자로서 승부했다. (이정후가) 첫 타석에서 긴장을 한 듯했지만 나중에 게임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감각을 찾아가는 듯해서 좋은 타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정후를 일찌감치 ‘1번타자 중견수’로 못박았던 샌프란시스코의 밥 멜빈 감독은 이정후의 MLB 데뷔전을 지켜본 소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멜빈 감독은 “이정후는 까다로운 왼손 투수를 상대로 우리한테 리드를 가져오게 하는 희생플라이를 기록해 타점을 만들어줬다”면서 “데뷔전에서 7회 이후 리드를 안겨줬기에 생산성 있는 출발을 한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데뷔전을 마친 이정후의 소감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경기 마치고 유니폼만 벗은 채 자신의 라커 앞에 앉아 있던 이정후는 “어휴 힘드네요”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까지의 시범경기에서 9회까지 경기에 나선 적이 없었고, 정규시즌 데뷔전이라 긴장을 감춘 채 경기에 임하다 보니 이정후가 느꼈을 피로감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뷔전에서 아쉬운 점이 있느냐고 묻자 이정후는 “아쉬운 건 없고, 재미있었다. 꿈에 그리던 데뷔전을 치르게 돼 기분 좋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정후는 다르빗슈 맞붙었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첫 타석에선 내가 수 싸움에서 완전히 졌고, 다르빗슈를 분석했을 때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많이 던진다고 나왔는데 초구는 뭐가 들어오든 무조건 방망이를 돌리려 했다. 두 번째는 커브였고, 2스트라이크에서 직구나 슬라이더를 생각했는데 뭔가 훅 지나가서(직구) 수 싸움에서 졌다. 한 타순 돈 다음에 보니 오늘 다르빗슈의 직구 컨디션이 좋아 보여 빠른 볼을 던지 것으로 생각해 그때부턴 더 빠른 볼을 생각했다. 오늘 교훈은 아무리 분석을 해도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석은 참고용으로만 봐야 할 것 같다.”
이정후는 김하성에 대해 남다른 고마움을 나타냈다.
“견제사 당한 후 하성이 형으로부터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바로 생각을 고쳤다. 솔직히 첫 안타 후 바로 견제사를 당해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하성이 형 덕분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김하성은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이)정후가 첫 안타가 나온 후 조금 흥분했던 것 같다”면서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신경쓰지 말라고, 괜찮다고 했다”고 설명한다. “정후가 강심장이고, 멘탈이 좋아 긴장은 안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수 교대나 주자로 나갔을 때 말을 걸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하성은 후배가 아닌 같은 선수로 본 이정후를 이렇게 평가한다.
“오늘 타격하는 걸 보고 정후가 충분히 MLB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유인구에도 방망이가 나가지 않았고, 공을 맞히는 건 당연히 좋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생플라이를 만들어냈다.”
이날 김하성은 5회초 두 번째 타석 무사 1루에서 중견수 이정후 쪽으로 향하는 시즌 첫 안타를 때렸다. 김하성은 그 안타가 나온 상황을 떠올리며 “정후가 우중간 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2루타였다”고 말해 취재진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이정후와 김하성은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4연전을 치른 다음 4월 6일부터 샌프란시스코 오라클파크에서 열리는 3연전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다. 상대 팀 선수지만 진심으로 서로가 잘 되길 응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된 2024년 3월 29일이었다.
미국 샌디에이고=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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