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갈등으로 전국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에 돌입한 지 두 달가량이 지났다. 의료대란으로 번지기 전에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문가들은 지금이 의료개혁의 적기라고 말한다. ‘전공의 중심의 대형병원 인력구조’ ‘무너진 의료전달체계’ ‘PA(진료지원) 간호사 합법화’ 등 그동안 의료 현장에서 부조리로 지목되어 온 문제들이 이번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일부는 해소의 실마리까지 보여준 까닭이다. 전공의 사직이 촉발한 의료개혁의 과제는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짚어본다.[일요신문] 의·정 갈등이 8주 차로 접어들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는 간호사들이 울분을 토하고 있다. 일요신문이 직접 만난 간호사들은 크게 두 가지 모습이었다. 전공의 업무까지 떠맡은 PA 간호사의 경우 폭증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고, 진료가 줄어든 병원의 간호사들은 무급휴가를 받고 고용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한편 전공의 공백 사태 초반부터 지금까지 줄곧 현장을 지켜온 간호사들은 “간호법 논의는 다시 사라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유명무실한 정부 지침
의료 현장에 남은 간호사들은 의사들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 정부가 전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의사 업무 가운데 일부를 PA 간호사가 할 수 있도록 임시적으로 허용한 까닭이다.
정부는 3월 8일 간호사들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한 ‘간호사 업무 시범사업 보완 지침’을 시행했다. 지침에 따르면 간호사는 10개 분야 98개 진료행위 중 X-ray, 방광조루술, 전문의약품 처방, 전신마취 등 9개 행위를 제외한 89개 진료지원행위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각종 동의서(수술/시술, CT/MRI 등) 받기, 교수의 ID로 대리처방, 드레싱을 포함해 의사가 직접 투여해야 하는 항암제 등 주사제 투여, 수술 기록지 작성, 채혈, 중심정맥압 측정, 심폐소생술은 물론이고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중심정맥 삽입관 제거, 요도관 삽관, 식도 내 튜브 삽관 등도 간호사 업무가 됐다.
의료계 안팎으로 제기되는 의료 사고 우려에 보건복지부는 ‘임상 경력 3년 이상 간호사’를 PA 간호사로 전환할 것을 권고했다. 숙련도와 자격에 따라 전문간호사와 전담간호사, 일반간호사가 할 수 있는 업무 범위를 설정해 놓았지만 막상 현장에선 유명무실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간호사 A 씨는 “업무 범위에 대한 구분은커녕 제대로 된 교육 없이 PA 간호사로 전환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3년 이상의 임상 경력을 가진 간호사가 배치되느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했다. A 씨는 “PA 간호사로 투입되는 간호사들의 연차는 천차만별이다. 처음부터 전공의가 부족한 외과의 경우 오래전부터 PA 간호사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고연차가 있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과에서는 전공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규까지 PA 간호사로 배치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A 씨는 의료 사고를 낼까 전전긍긍인 신규 간호사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신규 간호사는 배워야 할 게 많은데 병원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니 정신이 없다. 일단 업무 배치를 하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배우라는 식이다. 의료 사고 내고 법적 책임까지 짊어지게 될까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정부가 이번 지침에 의료 사고 발생 시 ‘병원장 책임’이라고 적시했지만 현실에서는 해당 간호사에게 책임의 화살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폭증한 업무량에 비해 제대로 된 보상은 되지 않고 있다. 중부권의 한 대학병원의 간호사 B 씨는 “전공의 부족으로 연장근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법적으로 주 52시간을 지켜야 하다 보니 실제 업무 시간이 주 52시간을 초과하더라도 수당을 받지 못 한다”고 말했다.
반면 공백의 사태가 길어지며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간호사들도 적지 않다. 대형병원 소속 간호사 C 씨 역시 처음에는 연차를 소진하는 응급 오프를 쓰다가 최근 무급휴가 권고를 받았다고 했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초반에는 의사의 업무를 대신 했으나 의·정 갈등이 길어지면서 병원에 진료 자체가 줄어든 탓이다. 실제로 서울아산병원은 기존 간호사들에게 한 달 정도의 무급휴가를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4월 8일에는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 가운데 최초로 서울아산병원이 의사를 제외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
기존 인력도 다 못 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보니 신규채용도 밀리고 있다. 앞서의 C 씨는 “올해 초 병원에서 신규 간호사를 뽑았으나 업무 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위에서는 무급휴가를 종용하고 아래에서는 병원의 연락만 기다리는 후배들이 한가득이다. 중간에 낀 현직들은 돈도 벌지 못하면서 이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모습 감춘 간호법 논의
사태 초반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던 간호법 이야기는 전공의 공백 8주 차인 현재 모습을 감추었다. 이미 3월에도 취재 과정에서 만난 현직 간호사들이 의료 공백 사태가 마무리되면 정부가 간호법 제도화 방침을 뒤집을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낸 바 있다. 4월에 다시 만난 간호사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익명을 요청한 한 국립병원 소속 간호사는 “2020년 의사 파업 당시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제도화 논의가 나왔지만 결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엎어졌다. 이번에도 의사가 돌아오면 법안은 폐기될 것 같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 병원의 또 다른 간호사 역시 “간호법이 스티커도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붙였다 떼었다 하느냐”고 불편한 속내를 내비쳤다.
한편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3월 28일 간호사의 업무범위 등이 담긴 간호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이번 제정안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전문간호사의 자격과 업무 범위 등을 구체화하고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도 제도화했다. 폐기된 법안 내용 가운데 논란이 됐던 ‘지역사회’ 문구는 삭제됐다. 당시 법안에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들은 “간호사들이 지역사회에서 단독 개원을 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다만 법안이 나온다고 해도 상정까지는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간호법이 상정되기 위해서는 기존법 발의 당시의 불가 사유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간호법은 2023년 4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직역 간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박민수 2차관은 관련 브리핑에서 “간호법 발의 당시 몇 가지 불가 사유가 해소돼야 법안으로 성안될 것이다. 구체적인 법안의 형태가 나와 봐야 판단이 가능하다”며 찬반 여부에 대한 자세한 말은 아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