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갈등으로 전국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에 돌입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의료대란으로 번지기 전에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문가들은 지금이 의료개혁의 적기라고 말한다. ‘전공의 중심의 대형병원 인력구조’ ‘무너진 의료전달체계’ ‘PA(진료지원) 간호사 합법화’ 등 그동안 의료 현장에서 부조리로 지목되어 온 문제들이 이번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일부는 해소의 실마리까지 보여준 까닭이다. 전공의 사직이 촉발한 의료개혁의 과제는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짚어본다.[일요신문] 의·정 대치가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의대 증원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지만 두 집단이 유일하게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필수의료 수가에 대한 문제다.
무엇을 바꿔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필수의료 보상 강화’로 의견이 모인다. 다만 방법에 대한 의사들의 목소리는 다양하다. 필수의료의 수가를 인상해 전문의들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과 횟수별로 지급되는 현재의 행위별 수가체계를 결과 중심의 가치기반 지불제도로 바꿔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현 시점에서는 모든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개원 택한 전문의 “살인적인 노동강도 버티기 힘들어”
의사는 졸업 후 수련 여부에 따라 일반 의사와 전문 의사로 나뉜다. 과거 90% 이상의 의사가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를 취득한 것에 비해 최근 그 비율이 줄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반의 대비 전문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년 3000명 넘는 의사가 배출돼 수련병원으로 향하는데 정작 해당 병원의 필수의료과(바이탈) 전문의는 점점 더 부족해지고 있다. 수련을 마친 의사들이 전문의를 취득하고 나면 대부분 개원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부는 의대생을 증원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 많던 전문의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에 대해 의사들은 전문의들이 더 이상 대형병원에 남을 명분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문의 A 씨 역시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뒤 병원을 떠나 개원했다. 그는 “바이탈 이탈 문제를 윤리적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경제적 논리에서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바이탈을 선택했으나 따라오는 보상이 턱없이 부족하면 결국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상은 비단 임금만을 말하지 않는다. 기본적 경제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금전적인 급부는 물론 복리후생, 동기부여, 사회적 지위 등 비금전적 급부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에 대해 A 씨는 “자부심, 돈, 건강, 시간 중에 하나라도 있어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데 바이탈에서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우선 대형병원이 흉부외과나 소아과처럼 수익성이 낮은 과의 전문의를 고용하지 않는다.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대폭 늘어도 돈을 벌지 못 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다른 과에 비해 적게 뽑는다. 결국 소수의 전문의들에게 업무가 몰리면서 노동강도만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한편 같은 바이탈이어도 내과나 마취통증의학 계열은 오히려 병원이 전문의 채용에 애를 먹는다. 이들은 개원가로 나갔을 때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비결은 비급여 치료에 있다. 한번쯤 동네 내과나 통증병원에서 영양주사 혹은 도수치료를 권유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 환자가 직접 부담하지만 실손보험 처리가 가능한 비급여 항목이다. 실손보험 도입으로 비급여 시장이 확대되면서 수익 창출 가능성이 높아진 전문의가 개원가로 빠져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개원을 한 의사들도 굳이 대형병원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A 씨는 “벌이와 상관없이 개인의 신념에 따라 바이탈을 택했다고 해도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무너지는 건강 앞에서는 버티기 힘들다. 그런 와중에 워라밸 챙기며 벌이까지 넉넉한 개원의 동료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개원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며 “바이탈 인력이 병원에 남을 수 있도록 수가 인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류옥하다 전 가톨릭중앙의료원 인턴 대표가 4월 2일 공개한 전공의 1만 2774명과 의대생 1만 834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공의와 의대생 82.5%가 구체적인 필수의료 수가인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정부 “행위별 수가제, 지속 가능한 시스템 아냐”
정부를 포함한 일부 교수들은 현재의 수가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 어느 한쪽의 수가가 높아지면 다른 한쪽은 필연적으로 낮아지는 제로섬 게임 구조와 같은 지금의 의료비지급 체계에서는 단순히 수가 인상만으로 특정과 기피 현상을 없앨 수 없다는 말이다.
홍윤철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역시 의대 증원의 방점은 지불보상제도 개혁에 있다고 했다. 의사인력 증원의 필요성은 인정하나 동시에 지역·필수의료체계 개혁이 이뤄져야만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정부가 의대 증원 2000명의 근거로 삼았던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진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0명을 일방적으로 증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합리적 규모는 500명에서 1000명 정도다.
다만 현 정부가 ‘행위별 수가제’를 손보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행위별 수가제란 의료 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기는 방식의 의료비 지불 제도다. 진찰료와 검사료 등 모든 개별 행위마다 단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의사는 최대한 많은 환자를 받을수록 이득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정작 진찰은 3분 남짓 받은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홍 교수는 “행위별 수가제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라고 했다. 홍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을 살리는 응급수술의 수가가 MRI 촬영 수가보다 낮다. 진찰과 입원 등 기본진료 수가는 원가에 못 미치지만 영상·검체 검사는 원가보다 과잉해서 보상한다. 필수의료 인력 부족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의료 행위가 많을수록 수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의료 수요가 적은 지역 의사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적은 보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환자 입장에서도 피해가 크다. 횟수에만 매달리는 행위별 수가제는 공급자 중심의 분절적인 의료서비스를 낳는다. 일례로 신체 능력이 저하된 환자의 경우 경미하지만 다양한 증상이 많다. 이런 환자가 여러 과를 개별적으로 전전하다 보면 실제 질환의 심각성에 비해 과한 양의 약물을 처방 받게 된다. 과한 약물 복용은 높은 확률로 부작용을 초래하고 새로운 의사는 이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약물을 처방한다. 약이 약을 부르는 ‘처방연쇄’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부는 대안으로 ‘가치기반 지불제도’를 제시했다. 가치기반 지불제도는 일종의 대안적 지불 제도로 의료인이 제공한 의료의 질과 최종 성과에 따라 차등 보상을 제공하는 지급 체계다. 의료행위를 몇 번이나 했는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 회복이라는 성과와 그 가치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가치 기반의 대안적 지불제도 도입을 위해 건강보험 재정 내에 따로 계정을 마련하고 약 2조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홍 교수 역시 12일 국회에서 열린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 관련 쟁점과 해결과제’ 간담회에서 “수가를 행위 기반에서 가치 기반으로 전환해야 한다. 소아과와 산부인과에 대해 가산 수가를 적용하겠다는데 그것은 임시방편”이라며 “사망률 감소, 높은 치료율, 질병 예방, 건강지표 개선 등 의료서비스의 성과지표를 갖고 지불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공의 “의대 증원 정책 백지화가 먼저”
그러나 대안적 지불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한 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해 보인다. 이번 사태의 중심인 전공의들이 “현 시점에서는 의대 증원 정책을 백지화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혜주 대한전공의협의회 전 정책이사는 4월 17일 세계의사회(WMA) 산하 젊은의사네트워크(JDN) 주최 행사에 참석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과 지불제도 개편 조치는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고 상황을 악화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했다. 앞서의 류옥하다 대표가 공개한 설문조사에서도 전공의 93.0%가 정부의 의대 증원·필수의료 패키지 백지화를 요구했다.
한편 상당수의 의사들도 가치기반 지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가치기반 지불제도나 성과연동지불제 등의 대안적 지불제도의 최종 지향점은 총액계약제일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총액계약제’는 정부가 진료비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주어진 기간 동안 의사, 병원 등 다양한 공급자에 의해 제공되는 진료 서비스와 약품에 대한 총 비용을 사전에 책정해 지불하는 제도다. 지역별·의료단체별로 계약을 맺어 지불 총액을 미리 정한 뒤 계약 총액 범위 내에서 의사·약사에게 의료비나 약제비를 지급한다. 의사들은 총액계약제가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의사를 무한 경쟁으로 내몰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