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지, 구쯔하오 격파 최대 이변
비록 16강 진출은 좌절됐지만 이번 응씨배 온라인 최대 이변은 ‘차세대 바둑여제’ 김은지 9단(16)이 일으켰다. 김은지는 본선 첫 판인 56강전에서 중국랭킹 5위이자 2023년 란커배 우승자 구쯔하오 9단에게 221수 만에 흑으로 불계승을 거뒀다. 앞서 치러진 국내 선발전에서 여자조 1위를 차지해 응씨배에 처음 출전한 김은지가 데뷔전에서 세계챔피언 출신 구쯔하오를 침몰시키는 이변을 낳은 것. 흑을 든 김은지는 좌상귀에서 사석 작전을 펼치며 중앙에 두터운 세력을 형성했다. 이어 중반 전투에서 좌하귀 백돌을 강력하게 압박한 뒤, 약해진 중앙 대마를 과감하게 공략한 끝에 포획해 완승을 거뒀다.
과거 최정 9단이 2019년 LG배 본선에서 구쯔하오에게 승리를 거뒀고, 2022년 삼성화재배에서 양딩신 9단을 꺾은 적이 있지만 16세 소녀 기사가 정상급 중국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더욱 기가(棋街)의 주목을 받았다.
대국을 마친 김은지는 “상대가 구쯔하오 9단으로 결정된 후 그의 기보를 많이 봤다. 바둑 스타일이 전투형인 것 같아서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승리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고 난적을 꺾은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김은지에게 아쉬웠던 점은 대진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 하필 다음 28강전 상대가 중국의 떠오르는 강자 왕싱하오 9단이었던 것. 김은지는 왕싱하오를 상대로도 두터움을 바탕으로 한 공격바둑을 펼쳤지만 왕싱하오의 치고 빠지는 전략에 고전하며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시훈 9단은 김은지의 대국을 지켜본 후 “최근 나카무라 스미레 3단이 한국행을 택하면서 한국 여자바둑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단연 김은지 9단이 눈에 띈다”면서 “수읽기가 무척 강해 힘이 넘치고 빈틈이 없다. 스미레 3단에게도 큰 자극이 될 터이고, 한국 여자바둑계가 앞으로 무척 재미있어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한편 국내랭킹 3위 박정환 9단도 구쯔하오처럼 이변의 희생양이 될 뻔한 장면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첫 판에서 대만의 2000년생 천치루이 8단을 꺾은 박정환의 다음 상대는 일본의 여자 강자 우에노 아사미 5단. 두 번이나 응씨배 결승에 올랐던 박정환은 우에노 아사미 5단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가 예상됐으나 의외로 고전했다. 유리하던 형세에서 역전을 허용해 한때 승률이 2%대까지 떨어지고 제한시간 초과로 먼저 벌점을 부여받는 등 고전했지만, 막판 끝내기에서 재역전에 성공하며 반집 차로 간신히 16강에 입성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여자바둑의 급성장을 실감할 수 있었던 장면”이라며 입을 모아 놀라워했다.
#한국 5명, 응씨배 정상 도전
이 밖에 신민준 9단은 중국의 CCTV배 우승자 황밍위 6단을 꺾었고, 원성진 9단은 일본의 백전노장 이야마 유타 9단에게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올랐다. 또 전날 메이저 세계대회 본선 첫 승을 신고했던 김진휘 7단은 일본의 야마시타 게이고 9단에게 327수 만에 백4집반승하며 메이저 세계대회 첫 16강 무대를 밟게 됐다.
58명이 출전한 이번 응씨배에는 전기 우승자 신진서 9단과 준우승자 중국의 셰커 9단이 16강 시드를 받은 가운데 56명이 온라인 대국으로 경합을 벌인 끝에 14명이 16강에 합류했다. 국가별로는 한국이 신진서 9단을 포함해 5명이 진출했고 중국은 셰커, 커제, 리쉬안하오 9단 등 가장 많은 9명이 진출했다. 일본은 중국의 투샤오위 8단을 꺾은 이치리키 료 9단이 홀로 16강전에 나서고 대만에선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쉬하오훙 9단이 중국의 강호 셰얼하오 9단을 누르고 16강에 올랐다.
대면 대국으로 진행되는 본선 16강전은 7월 2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3일 16강전, 4일 8강전이 차례로 열린다. 3번기로 치러지는 준결승전은 장소를 저장성 닝보시로 옮겨 6일부터 9일까지 벌어진다. 결승5번기는 8월과 10월 나눠 열리면서 올해 안에 우승자가 탄생한다.
88년 창설된 응씨배는 대회 창시자인 고 잉창치(應昌期) 선생이 고안한 응씨룰을 사용한다. ‘전만법’이라고도 불리는 응씨룰은 집이 아닌 점(點)으로 승부를 가리며 덤은 8점(7집 반)이다. 응씨배의 우승 상금은 단일 대회로는 최고 액수인 40만 달러(약 5억 5000만 원), 준우승 상금은 10만 달러다.
제10회 응씨배 본선16강 명단
한국(5명) : 신진서 9단(전기시드), 박정환 9단, 신민준 9단, 원성진 9단, 김진휘 7단
중국(9명) : 셰커 9단(전기시드), 커제 9단, 리쉬안하오 9단, 리친청 9단, 랴오위안허 9단, 쉬자양 9단, 왕싱하오 9단, 펑리야오 8단, 류위항 7단
일본(1명) : 이치리키 료 9단
대만(1명) : 쉬하오훙 9단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