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마루(일장기) 가전의 몰락’, ‘가전 패전’, ‘비상사태’. 근래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국 가전업체를 두고 일본 언론이 쏟아내고 있는 말이다. 실제 올 상반기 회계에서 일본의 가전업체들은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다. 3대 가전업체인 소니, 파나소닉, 샤프의 적자 합계만 1조 6000억 엔(약 22조 4300억 원)에 달한다. 내수 및 수출 부진, 중국과 대만 가전업체의 급부상, 애플과 삼성의 선전에 엔화 상승이란 악재까지 겹치면서 일본의 기간산업인 가전업계가 통째로 흔들리는 가운데 대형업체는 물론 중소가전업체까지 전례 없는 구조조정이 단행되고 있다. 이미 각 업체는 수천, 수만 명 단위의 인원감축을 발표했는데, 업계에서는 올해 말까지 무려 13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내다본다. 경제지 <주간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거품경제가 붕괴한 1993년 이래 사상 최악의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일본 가전업계를 들여다봤다.
지난 8월 28일 아침 도쿄에 위치한 일본 굴지의 가전업체 NEC 본사에서 한 남성 사원이 투신자살을 했다. 이날은 마침 NEC가 40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접수를 받아 2393명이 조기퇴직을 신청했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NEC 측은 “자살한 사원은 39세라 희망퇴직 대상이 아니다”며 인원감축과 자살의 관련성을 애써 부인했지만 일본 국회에서까지 진상조사가 거론될 정도로 충격을 줬다. 일본의 전기정보 노조는 “NEC가 올해 인원감축 목표 1만 명을 채우려고 사원의 목을 조르고 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업체는 비단 NEC뿐만이 아니다. 판매고전으로 일본시장에서 공짜 스마트폰까지 내놓는 굴욕을 맛볼 지경으로 경영난이 심각한 소니도 역시 1만 명 감축을 목표로 내놓았다. 지난 2008년 말 1만 6000여 명을 해고한 데 이어 3년 만의 대규모 감원이다.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신념으로 종신고용을 고집해온 파나소닉도 연내 본사 근무 인원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7000명을 줄일 계획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들은 일제히 “창업자 정신을 저버리더니 이제 본사라는 성역도 무너졌다”고 평하고 있다. 앞서 2011년 파나소닉은 2013년까지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인 4만 명 감원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올 6월 주력 공정라인을 애플의 하청업체인 대만 폭스콘에 헐값에 매각한 샤프도 곧 5000명을 감축할 예정이다. 이 수치는 전체 직원의 10%에 해당하는데 1950년 이래 초유의 사태다. 샤프의 오쿠다 다카시 신임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경영 악화를 토로했다. 샤프는 그간 사활을 걸어온 액정패널 사업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주가가 70%나 폭락했다. 게다가 내년까지 금융권 대출금을 못 갚으면 본사 건물을 비롯해 공장 전체를 매각하는 절차를 밟을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일련의 인원 감축에 대해 <주간다이아몬드>는 “이제는 고소득 엘리트층 가전업체 중견사원조차 불안이 팽배한 지경”이라 전하고 있다.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지만 내일 잘리는 이가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떨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일본의 인터넷에는 한 대형 가전업체 직원이 퇴직을 권유받은 체험담을 쓴 ‘나는 이렇게 퇴직을 강요당했다’는 글이 일파만파로 퍼졌는데 내용이 사뭇 처절하다. 이 직원은 두 달간 상사로부터 퇴직을 11차례나 요구당한 후 마음먹고 글을 썼다고 한다. 초반 면담 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고치겠으니 알려 달라”는 이 직원에게 “고칠 건 없다”고 하던 정도에 그치던 상사는 직원이 퇴직을 계속 거부하자 점차 강경한 태도로 변해갔다. 퇴직 종용을 더 이상 못 듣겠다고 하는 직원에게 이 상사는 “면담을 안 하는 건 일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을 못한다는 것”이라며 사실상의 해직 통보를 했다고 한다.
이 직원은 글에서 “자그마치 100번씩이나 그만두란 소리를 들었다”며 “이제는 스트레스, 노이로제로 인해 불면증이 생겼다”고 호소하고 있다. 글이 올라오면서 가전업계 직원들이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는 심지어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내전 중인 시리아로 전근시키겠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글도 올라왔다.
비정한 예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병에 걸려 휴직한 사원을 카페로 불러내 퇴직하라고 설득하거나 난데없이 이력서를 제출하게끔 하더니 하청업체로 출근하라고 하는 식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일본의 네티즌들은 “어쩌다 세계 가전업체 주역 일본이 구조조정 지옥이 되고 말았느냐”며 해고 위기에 놓인 사원들의 딱한 처지에 동정을 보내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연히 가전업체 사원들의 동요가 상당하다. <주간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인생 계획이 다 틀어졌다”며 한탄하는 이들이 많다. 또 “길게 가봐야 내년, 내후년에는 해고될지 모르니 회사에 충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며 “인맥이나 스킬을 쌓아 아예 전업을 하겠다”는 가전업체 사원들도 늘었다.
도치기 현 샤프 공장에서 일하다 해고된 25세 청년은 <주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건 뭐 비정규직원이건 정사원이건 나이든 사원이건 신입사원이건 죄다 잘라버리는 상황”이라며 “회사가 기울어지는 건 한순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몸이라도 팔겠다”며 비통한 심정을 전하고 있다.
분위기가 크게 술렁이면서 몇몇 가전업체에서는 사원들의 동요를 막고자 해고권고용 면담 매뉴얼, 일명 ‘부장의 마음가짐’을 작성해 배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간포스트>는 매뉴얼을 입수해 공개했는데 이를테면 해고를 통보하는 부장은 동료나 부하에게 ‘미안하다는 식의 감정을 내비치지 말 것’, ‘나란 주어 대신 회사란 주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란 주의사항이 담겨 있다고 한다. 또 ‘해고나 목을 자르겠단 표현은 절대로 하지 말고 대신 일이 없어지게 됐다는 점을 되풀이하라’는 점도 적혀 있다.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점은 해고 당사자가 직접 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부장의 마음가짐’에는 면담 시 가급적 해고 대상자가 많이 말하게끔 하고 그러는 사이 본인 스스로 그만두겠단 의사를 밝힐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고 쓰여 있다.
과연 대량해고가 일본의 가전업계의 불황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당분간 어려울 것이란 어두운 전망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가전업체에서 적자나 경영악화의 책임이 있는 실패한 경영진이 여전히 임원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주간다이아몬드>는 “리더십 발휘와 장기적 비전 수립 등 본질적인 개혁이 없으면 일본 가전업계의 불황은 계속될 것”이라 일침을 놓고 있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