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요정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주제는 배신 혹은 약속 파기에 따른 파국이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강에 투신한 로렐라이는 남성들의 목숨을 빼앗는 마녀가 되었고, 세이렌은 남성을 유혹하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멜루지네나 운디네에게는 남성이 약속을 어겼을 때 관계를 끝내거나 그의 목숨을 취해야 하는 징벌의 의무가 따른다. 멜루지네의 남편은 아내의 비밀을 알려고 해선 안 되고 운디네의 남편은 물가에서 아내를 비난하면 안 되지만 이들은 모두 약속을 어긴 대가로 아내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다. 물의 요정들은 모두 특정 약속에 묶여 있는 존재들로, 약속이 파기되었을 때 즉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징벌 아닌 구원 택한 인어공주
물의 요정으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인물은 안데르센의 동화 속 주인공 인어공주일 것이다. 안데르센은 인어공주에게 다른 물의 요정들에게는 없는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동화 속 인어공주의 행보를 다시 따라가보자. 용왕의 막내딸 인어공주는 열다섯 살 생일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되면 인간 세상인 육지를 구경하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로 나간 공주는 난파된 배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은 왕자를 구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은 인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한순간에 인생을 바꿔놓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왕자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을 시작한 인어공주에게 바다마녀는 목소리를 내어준다면 꼬리지느러미를 다리로 바꾸어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인간이 된 인어공주가 왕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마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계약이다. 정작 왕자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이웃나라 공주로 오인해 공주와 결혼을 약속한다. 인어공주의 언니들은 바다마녀에게 머리카락을 내어주고 동생의 목숨을 구할 방법을 알아낸다. 왕자를 죽이면 인어공주는 마법이 풀려 인간에서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있다.
물의 요정 선배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약속 파기에 따른 징벌을 수행해야 하는 것과 달리 약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어공주는 왕자의 목숨을 취하면 인어로 돌아올 수 있음에도 자신의 의지로 왕자를 살리고 물거품이 되는 길을 택한다. 왕자는 인어공주에게 두 번이나 구원받는다. 그리고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아니라 공기의 정령이 되어 불멸의 영혼을 얻게 되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간 원작자
지난 5월 1일부터 5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국립발레단 신작 ‘인어공주’는 마주보아야 완성되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2005년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맞아 덴마크 로열발레단의 의뢰로 제작되어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노이마이어가 안무는 물론 무대, 조명, 의상 일체를 맡았다. 코펜하겐에서 초연된 이후 함부르크발레단, 조프리발레단,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 단첸코 극장, 중국 국립발레단 등에서 공연되었다. 국내 발레단이 노이마이어의 안무작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이마이어는 동화 원작에 안데르센의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은 바이섹슈얼이라는 성적 지향으로 남모를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가 짝사랑하던 에드워드 콜린이라는 남성의 결혼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져 완성한 작품이 바로 ‘인어공주’다. 2막으로 구성된 발레는 작품 앞뒤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배치된 액자식 구조를 띠고 있는데, 프롤로그는 원작에는 없는 시인이 등장해 실연의 아픔을 삼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은 안데르센의 자아가 투영된 인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에드바드라는 남성이 다른 여성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시인의 눈물이 바다에 떨어지고 곧 인어공주가 등장한다. 원작자 안데르센과 주인공 인어공주의 절묘한 만남이 성사된 셈이다. 이후 시인은 무대에 머무르며 인어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지켜보는 관찰자 역할을 수행한다.
1막은 인어공주의 세계인 바다를 배경으로, 2막은 왕자의 세계인 육지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바닷속 인어공주는 통이 넓고 긴 푸른색 바지를 입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무용수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한쪽 다리를 들어 힘차게 바뜨망(Battement, 무릎을 곧게 편 상태로 다리를 힘 있게 차 올리는 동작을 가리킴)을 하는 모습은 생동하는 인어 그 자체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하고 그의 곁에 가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움직임 언어가 통용되는 발레 무대이기에 원작에서처럼 혀를 잘라 목소리를 잃는다는 설정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인어공주가 바다마녀에게 꼬리지느러미 대신 다리를 얻는 과정이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어 인어공주의 고통을 객석에까지 전이시킨다.
#사랑 원했지만 돌아온 건 연민
1막에서 시원스러운 움직임으로 바닷속을 자유롭게 누비던 인어공주는 2막에 와서는 다리를 얻었지만 아직 제대로 걷는 방법을 몰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고, 인간들의 언어를 익히지 못했기에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다. 세계의 경계를 건너와 고군분투하는 인어공주의 모습에 거동이 불편한 지체장애인 혹은 언어 습득이 지체된 발달장애인의 모습이 겹쳐지며 인어공주의 육지 적응기는 장애서사로 확장된다. 인어공주를 대하는 왕자의 태도는 친절한 편이지만 그가 내보이는 감정은 인어공주가 원하는 대등한 위치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어린 아이를 보는 듯 다분히 시혜적인 연민에 가깝다. 원래 살았던 세계인 넓은 바다와 대비되는 작고 하얀 방에 갇힌 채 인어공주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괴로워한다. 그는 사랑을 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연민 혹은 동정뿐이다.
왕자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인어공주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다. 바다마녀와 언니들이 찾아와 칼을 건네주며 왕자를 죽이면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주지만 인어공주는 그럴 수 없다. 게다가 인어공주가 그저 가엽고 귀엽기만 한 왕자에게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왕자는 신부와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퇴장하고 인어공주는 홀로 남는다. 인간이 되기 위해 꼬리지느러미가 뜯겨 나가는 고통을 감수했던 인어공주는 이제 인간의 옷과 신발을 벗어던지고 오열한다.
인어로도 인간으로도 살 수 없게 된 인어공주 앞에 시인이 나타난다. 둘은 보답받지 못한 사랑을 뒤로 하고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 그들이 올라서 있는 세트가 바닥에서부터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들어올려지기 시작하고 무대는 곧 밤하늘 별무리 속으로 바뀐다. 그들은 사랑을 잃었지만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이 보답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난 이제야 그들의 진짜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노이마이어는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사랑할 책임은 없다”며 냉정한 시선으로 사랑의 속성을 일갈하고 있다.
윤단우는 주로 사람과 사랑과 삶에 관한 생각의 편린들에 대한 글을 쓰며,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숨찬 마감이 기다리는 데스크를 오갑니다. 쓴 책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죽은 여자다’,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 ‘여성, 신체, 공간, 폭력’ 등이 있으며, 여성주의 공연 뉴스레터 ‘위클리 허시어터’를 매주 발행하고 있습니다.
윤단우 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