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적응 되지 않는다” 반응 많았지만 팬데믹 시대 거치며 ‘뉴 노멀’로 자리 잡아
봉준호 감독은 2020년 영화 ‘기생충’으로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수상 후 이 같은 소감을 밝혔다. 자막을 통해 언어의 다름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요즘 한국 드라마·영화 시장을 보면 이 명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 민족이라는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 한글 자막이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가 신선하고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는 호평과 더불어 “사족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지상파 드라마에도 파고든 자막
지상파 드라마에 처음 자막이 달린 것은 2023년이다. SBS가 드라마 ‘악귀’ 재방송에 자막을 적용했다. 이때만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SBS는 ‘악귀’ 이후 ‘법쩐’ ‘트롤리’ ‘모범택시 시즌2’ 등의 재방송에도 자막 서비스를 도입하며 연착륙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이제는 ‘재방송’이 아닌 ‘본방송’에도 자막이 붙는다. MBC는 4월 19일부터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본방송 자막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자 SBS도 동참했다. 한 주 뒤인 4월 26일 송출된 SBS 드라마 ‘7인의 부활’ 본방송에 자막이 쓰였다.
자막 서비스는 극장에서 먼저 시도했다. 김한민 감독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2022)의 전투 장면에 자막을 삽입했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해전이다. 물소리와 대포 소리, 총칼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대사 전달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막을 넣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자 후속작인 ‘노량’(2023)을 개봉할 때는 영화 전체에 자막을 입혔다.
2023년 7월 개봉한 영화 ‘밀수’는 한국 영화 최초로 아예 한글 자막 화면해설(CC) 상영을 도입했다. 이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뿐만 아니라 행동 지문까지 자막으로 표기된다. 배경음을 설명하기 위해 괄호 안에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막을 넣는 식이다. 몇몇 영화들이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리어프리 자막 상영을 진행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처럼 자막 상영을 일반화한 것은 최초 사례다.
이를 두고 각 방송사나 배급사들은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고 한 목소리를 낸다. 자막을 통해 보다 명확한 상황 설명이 가능하고 전달력 역시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청각장애를 가진 이들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시도라는 의견이 적잖다.
#OTT가 바꾼 풍속도
방송가의 자막 활용, 그리고 대중의 자막 읽기는 이미 익숙하다. 드라마 자막은 생소하지만, 이미 예능은 ‘자막 홍수’라 불릴 만큼 사용이 잦기 때문이다. 각종 신조어나 은어를 자막으로 붙이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이는 시사·보도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각 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의 하단에는 주요 내용을 담은 자막이 붙는다. 자막이 이미 일상 깊숙이 침투한 셈이다.
특히 팬데믹(대유행)은 자막의 일상화를 부추겼다. 코로나19로 인해 바깥생활이 힘들어진 시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급속도로 발달했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이 영향력을 키웠고, 티빙이나 웨이브, 쿠팡플레이와 같은 토종 OTT들도 등장했다.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이런 플랫폼이 제공하는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자막을 제공한다. 이는 글로벌 콘텐츠 기업이 세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190여 개국에서 서비스되는 넷플릭스는 각 나라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로 구성된 자막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한국에서 자막 서비스가 빠르게 정착한 데는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일조했다. OTT 콘텐츠는 통상 전편이 동시에 공개된다. 이를 TV 드라마처럼 ‘정주행’하는 이들도 있지만, 건너뛰면서 보거나 1.25~1.5배속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이 경우 대화의 속도 역시 빨라지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자막으로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를 읽으며 보면 이해도가 높아진다. 이런 시청 행태에 발맞춰 자막 서비스 역시 빠르게 연착륙에 성공한 셈이다.
결국 넷플릭스의 이러한 시도는 자막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그리고 이 이면에는 자막 서비스를 일반화하기 위한 장애인 단체들의 능동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다. 2011년 미국 청각장애인협회(NDA)는 장애인을 위한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 넷플릭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장애인 단체의 손을 들어줬다. 이를 기점으로 넷플릭스는 자막 서비스를 전면 시행했고, 이는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뉴 노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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