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윤’ 이철규 추대론 무산, 추경호 선출로 신주류 탄생…권성동 등 원조 윤핵관 잇단 실점으로 뒷선 밀려
#미워도 다시 한 번
여당의 원내대표 경선 과정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종전 같으면 용산이 찍은 인물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겠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총선 참패 이후 대통령실의 그립감이 예전 같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다자구도가 만들어졌다. 당의 주력이 포진한 영남권에선 4선의 김도읍(부산 강서) 김상훈(대구 서구) 김태호(경남 양산을) 박대출(경남 진주갑) 윤영석(경남 양산갑) 의원 이름이 나왔다. 영남 3선 그룹에서도 송언석(경북 김천) 윤한홍(경남 창원 마산회원) 이만희(경북 영천·청도) 의원이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김상훈 의원 등은 “원내대표를 해보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내놓기도 했다.
수도권 참패로 인해 대패를 당하고도 ‘또 영남 출신이냐’는 지적이 나오면서 비 영남권 대안 그룹도 떠올랐다. 그러면서 3선의 김성원(경기 동두천·양주·연천을) 송석준(경기 이천) 이철규(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 이양수(강원 속초·인제·고성·양양) 성일종(충남 서산·태안) 의원이 거론됐다.
비영남권 원내대표에 무게가 실리자 이철규 의원이 이내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2023년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사무총장에서 물러났지만 4·10 총선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았을 만큼 ‘찐윤’으로 꼽혀왔다. 더욱이 여당 원내사령탑은 정부의 국정 과제를 입법으로 실현하는 자리인지라 역대 전임 정부에서도 전통적으로 대통령실과 가까운 주류 핵심 몫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의원은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유력 후보로 급부상했다.
이 의원은 자신이 영입했던 인재들을 중심으로 연달아 조찬 회동을 하는 등 스스로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 의원은 모임 성격에 대해 “인재영입위원장으로서 소임을 마무리하는 것뿐”이라면서 과도한 해석을 경계하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주변에서는 차기 지도부로 역할을 염두에 둔 ‘몸 풀기’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나경원·이철규 연대설’까지 흘러나왔다. 차기 전당대회 유력 주자인 나경원 당선인과 이철규 의원이 각각 당 대표와 원내대표 경선에서 서로 도움을 주기로 한 것 아니냐는 게 그 골자다. 당사자인 나 당선인과 이 의원이 아니라고 일축했지만 당 안팎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각에선 이철규 원내대표론을 강화하는 차원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유력 후보군이었던 김도읍 의원이 4월 28일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철규 의원의 대세론은 확정론으로 가는 듯했다. 일부 친윤 그룹에선 ‘이철규 추대론’까지 나왔다. 이 의원이 당과 대통령실의 가교 구실을 해온 터라 극단적 여소야대 지형에서 당정 원팀이 적격이라는 목소리였다. 또한 민주당이 ‘친명’ 박찬대 원내대표 체제를 세운 상황에서 이에 맞서기 위해선 ‘찐윤’ 인사가 당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철규 대세론은 길게 가지 못했다. ‘찐윤당’ 이미지의 복원은 당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당 안팎의 강한 비판이 쏟아지면서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앞장섰다. 그는 4월 29일 페이스북 글을 통해 “불난 집에 콩줍기 하듯이 패장이 나와서 원내대표 한다고 설치는 건 정치 도의도 아니고 예의도 아니다”라고 쏘아붙였다.
홍 시장은 “우파가 좌파보다 더 나은 건 뻔뻔하지 않다는 건데 그것조차 잊어버리면 보수 우파는 재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걸 지적하는 사람 하나 없는 당이 되어버렸다”며 “우릴 궤멸시킨 애(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을 지칭) 밑에서 굽신 거리면서 총선까지 치렀으니 오죽하겠나”라고 덧붙였다.
강한 반대론이 떠오르자 이철규 대세론은 주춤했고 경선이 당초 5월 3일에서 9일로 전격 연기됐다. 윤 대통령까지 나서 국민의힘 원내대표 선출과 관련해 “의심 살 일은 하지 마라”고 말한 것으로 5월 3일 전해졌다. 대통령실 홍철호 정무수석은 이날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여소야대 상황에서 우리가 ‘이리 가자, 저리 가자’고 하는 것은 안 맞고 대통령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는 것 같다”며 이같이 전했다.
결국 이철규 의원은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예상 밖으로 추경호 의원이 5월 5일 출마를 전격적으로 선언했고 영남 견제를 앞세우면서 이종배(충북 충주)·송석준(경기 이천) 의원도 경선에 뛰어들었다.
당내에서는 추 의원의 출마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추 의원은 5월 9일 경선에서 과반인 70표를 얻으며 결선투표 없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투표에는 22대 국회 국민의힘 당선인 108명 가운데 102명이 참여했는데 이 의원은 21표, 송 의원은 11표를 얻는 데 그쳤다. 싱거운 싸움으로 끝난 선거 결과였다. 국민의힘 한 중진은 원내대표 선거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새 리더십을 억지로 마련하는 것보다 기존 리더십을 고쳐 쓰는 편이 낫다는 데 중론이 모아졌고 용산과 가까운 추 원내대표 체제가 들어서게 됐다. 용산과의 수직적 관계 탓에 선거 결과가 나빴고 용산이 야속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통령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의지가 더 강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권은 총선 참패 이후 복원력 회복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이번 신임 원내대표 경선은 여권의 노선을 엿볼 수 있는 방향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는데, ‘당정 원팀’으로 가는 분위기다. 당내 주류가 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윤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의 한 수도권 낙선자는 “추경호 신임 원내대표나 이번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는 새 당 대표나,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며 “분열 없는 원팀은 좋지만 계속되는 원보이스가 아니라 때로는 다른 목소리도 나와서 당의 진로를 과감히 변경시킬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권 핵심세력 교체
본인은 처음부터 나설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당내에서는 ‘이철규 의원이 나설 생각이 확실히 있었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결국 고배를 든 것에 대해서는 용산이 윤핵관을 굳이 계속 데리고 가야 할 필요성이 적어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두가 내편인데 굳이 운동장을 좁게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철규 의원 대신 추경호 신임 원내대표가 나서게 된 것을 두고 용산의 ‘보이지 않는’ 의지로 풀이되는 배경이다. 추 원내대표가 이철규 의원의 대안이 됐다는 의미다.
추 원내대표는 주변 사람들에게 “원내대표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내비쳤다고 한다. 그는 경제부총리를 하면서 고물가·고금리 등으로 인한 민생 현안이 많아 고생을 했고, 지역구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또다시 격무를 맡기 어렵다는 뜻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원내대표 후보군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고 이철규 대세론이 당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자 여권에선 ‘플랜B’가 가동됐다. ‘찐윤’ 색채가 많지 않으면서도 용산과 코드가 맞는 인물 모색이 시작됐고, 추 원내대표가 낙점된 걸로 분석된다.
용산의 의지가 투영된 모습은 원내대표 경선을 하루 앞두고 5월 8일 이뤄진 정견 발표장에서 확인됐다. 힘을 앞세운 야당의 공세를 막아낼 원내 운영 기조로 추 원내대표는 ‘강한 대응’을, 이종배 의원은 ‘협상 경험’을, 송석준 의원은 ‘상생과 조화’를 각각 키워드로 내세워 확실한 온도 차를 보였다.
추 원내대표는 이날 정견 발표 모두 발언에서 “여야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상하며 타협을 통해 협치하는 것이 의회 정치의 본령이라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당리당략에 치우친 부당한 정치공세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국민과 함께 거대 야당의 의회 독재에는 강하게 맞서겠다”고 강조했다.
‘찐윤’ 이철규 의원이 맥을 못 추는 모습을 보이고 대신 친윤 색채가 짙지 않은 추 원내대표가 대통령실과 당을 연결하는 여권 주류가 되면서 원조 윤핵관들은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모양새다.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권성동 의원은 22대 국회 입성에 성공했지만 2022년 9월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후 힘 빠진 모습이 역력해지자 언론의 조명에서 벗어나 있다. 권 의원 스스로도 ‘윤핵관’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의 당선인 비서실장을 지낸 장제원 의원 역시 2023년 3월 김기현 의원과 이른바 ‘김·장 연대’를 만들어 김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22대 국회로 들어오지 못한 채 권력 중심에서 비켜 서 있다. 윤한홍 의원 역시 총선에선 이겼지만 그 존재감은 예전만 못 하다는 평이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개국 공신이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분 손실이 없어야 하는데 이른바 윤핵관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총선에서의 대참패로 국민의힘이 쪼그라들면서 당내에서 지분을 대량 상실했다”며 “당연히 권력 중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인적 교체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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