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사이 신경전이 되살아날 불씨는 더 남아 있다. 최근 시작한 ‘수가협상’이 그 한 예다. 매년 이뤄지는 협상이지만 이번은 의사 증원 문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터라 분위기가 차원이 다르다. 의료 수가는 그동안 병원이나 의사들의 주요 일탈 수단 가운데 하나였던 만큼 이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지만, 수가 인상은 건강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 여론의 향방도 주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의료단체, '완패'와 '만회' 갈림길
의료기관의 보상 수준을 결정하는 수가 협상이 5월 3일 시작됐다. 이날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과 공급자 대표로 이뤄진 의약단체장들이 저마다 입장을 교환하는 상견례 자리를 가졌다. 여기서 건보공단은 재정지출 부담을 고려해 '균형 있는 수가'를 강조한 한편, 의약단체들은 '수가 인상이 곧 수가 현실화'라며 엇갈린 입장을 내세웠다.
올해 상견례는 이전보다 훨씬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의대 입학정원 증원 문제로 정부와 최일선에서 대립각을 세운 대한의사협회가 "의미 없는 협상"이라며 보이콧을 선언한 상황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날 의료단체에선 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약사회·대한간호사협회만 나섰다.
특히 1차 협상이 개시된 5월 16일 서울고등법원 제7행정부(부장판사 구회근)가 의료계가 낸 의대 2000명 증원 집행정지 신청에 기각·각하 결정을 내리며 의약 단체들의 감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상견례에 불참했던 의협은 1차 협상에 참석했는데, '수가 최소 10%인상'과 '수가협상 전 과정 생중계'를 요청하기도 했다.
의약 단체들은 의사 증원의 선결 과제가 '수가 현실화'라고 여론전을 펴온 만큼, 이번 협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법원이 의사 증원에 힘을 실어준 가운데, 수가 인상마저 못 이루면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료단체가 사실상 '완패'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어서다. 무엇보다 현재로선 정부를 압박할 카드가 거의 없다는 관측이 크다.
#진료비 '과잉청구' 다반사…낮은 수가 탓?
전망은 분분하다. 우선, 의약 단체가 요구하는 수준의 수가 인상을 내다보는 쪽은 의사 증원 문제를 떼어 놓고 봐도 저수가가 의료계에서 여러 문제를 불러 일으켜왔다고 지적한다. 의사들 시각에서 너무 낮은 수가가 과잉 진료를 유발하고, 이는 결국 소비자 피해로 돌아간다는 분석이다.
실제 보건복지부도 이를 숙제로 보고 있다. 2024년 4월 마련한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재정투자 방향 및 이행계획'에서 복지부는 '의료행위마다 수가를 책정하는 구조가 소비자의 병원 이용을 늘린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연간 1인당 평균 진료 횟수는 5.9회인데, 한국은 15.7회로 3배가량 많다.
일요신문이 확보한 교육부의 주요 대학 의료기관 감사 결과에선 더욱 적나라한 실태가 드러난다. 서울대 등 국내를 대표하는 대학의 병원들도 수가를 과잉 청구하는 등 부정한 행위를 수차례 반복해왔다. 교육부나 감사원 등의 감사 대상에서 제외된 대학 및 병원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더 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서울대의 경우 2017년 감사원 감사 결과 2014∼2016년 수가 계산상 청구해선 안 될 61만 5276건의 자기공명영상(MRI) 영상 촬영료를 청구한 사실이 적발됐다. 그 후 2023년 교육부가 공개한 감사 결과에서도 이는 개선이 되지 않았다. 서울대 치과병원이 환자 727명에 821건, 총 3204만 3000원을 초과 청구하다 발각됐다.
부산대 치과병원은 2022년 교육부 감사에서 2018∼2019년 201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불필요한 보험급여 4억 956억 원을 청구하다 걸렸다. 또 개당 2만 6950원짜리 의료물품을 2만 9760원에 444개 구입했다고 속여 총 124만 7640원의 건강보험급여를 부적정 청구한 사실도 동시에 적발됐다.
이 밖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23년 4∼6월 실시한 현지 조사에서도 각 병원들이 의료비를 부당하게 청구하는 각양각색 수법들이 드러났다. 입원하지도 않은 환자가 입원했다고 속이는 사례 등은 흔했다. 가동하지 않은 의료장비를 활용해 진료를 했다는 방식도 뻔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눈에 띄는 적발 사항 가운데에는 휴가를 떠난 간호사들이 근무를 했다고 꾸미고 간호등급을 속여 요양급여를 청구한 곳이 있었다. 현재 규정은 1명의 간호사가 담당하는 병상 수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고, 높은 등급을 받으면 입원관리료로 보전을 받는다. 이 비용의 약 80%는 의료보험 재정에서 나온다.
또 다른 병원은 특이하게도 의료보험료로 청구할 수 있음에도 환자에게 본인 부담금을 내게 하고, 이마저 과다하게 징수한 사실이 적발됐다. 해당 병원은 당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비용을 청구했으나 비용을 조정한다는 코드가 뜨자, 환자에게 직접 돈을 내도록 했다고 한다.
#최종 계약 6월 30일까지 연장 가능
다만 의료계가 요구하는 수가 현실화가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수가 인상은 곧 건강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정부 입장에선 물가 인상 등이 심화한 상황에도 부담을 느끼는 탓이다. 정부가 2023년 협상에서 의약단체와 협상 결렬 후 건강보험료율을 7.09%로 전년도와 동결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수가 인상을 둘러싼 의정 갈등 2차전이 예상된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의료 시스템을 죽이는 불합리한 수가 협상이 더 이상 이어져선 안 된다"며 "이번 수가 협상은 정부가 정말 필수 의료 살리기에 뜻이 있는지 판단할 중요한 지점"이라고 밝혔다.
의협 관계자는 "상견례는 형식에 불과해 불참했으나 본 협상에는 합류해 현실화를 적극 강조할 계획"이라며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 등과 비교해 보면 같은 의료 행위를 하더라도 보상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인 데다, 이는 의사들의 필수의료 분야 진출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2022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 등 간혹 수술 가능한 의사가 없어 환자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불거졌지만 이를 의사 절대 수가 부족하다고 봐선 안 된다"며 "너무 낮은 수가가 특정 분야의 의사를 유인하지 못하는 현실이므로 수가 현실화는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번 수가협상에 따른 최종 계약은 5월 31일 이전에 결정된다. 만약 결렬되면 6월 30일까지 연장될 수 있다. 이번 협상에 참석한 단체 한 관계자는 "의협 등이 의사 증원 문제로 강성 발언을 반복해왔기에 정부 심기도 불편할 것"이라며 "그러나 의약단체도 2023년 결렬 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역대급' 난항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출신 대학 차별에 연구비로 유흥주점 출입…대학병원 천태만상
과잉진료에 따른 수가 과다 청구 외에도 대학병원 등에 불거지는 각종 문제점들도 눈길을 끈다. 고질적인 문제로 꼽혀 온 일부 의사들의 성범죄는 물론 일부 대학은 입사 지원자들의 출신 대학을 차등화해 평가하는 식의 잘못을 반복해 왔다. 특히 이해관계자, 즉 '뒷배'를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악습도 되풀이했다.
서울대 치과병원의 경우 2023년 교육부 감사 결과, 입사 지원자와 혈연·학연·지연 등 친분이 있는 면접관은 채용 전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정을 대부분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어긴 사례가 있었다. 또 2019년부터는 규정에 명시된 성범죄 경력 조회를 누락한 채 3년 동안 33명의 의료인을 채용했다.
전국 곳곳에 부속병원을 둔 차의과대와 이를 운영하는 재단 성광법인 역시 의료인와 교직원을 채용하며 성범죄 경력을 확인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됐다. 차의과대 역시 이를 문제로 인식한 듯, 일부 직원을 대상으로 뒤늦게 경력 조회에 나섰으나 이미 채용하고 194일이 지난 뒤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성범죄를 저질러 검거된 의사는 793명(한의사·치과의사 포함)이다. 연도별로 2018년 163명, 2019년 147명, 2020년 155명, 2021년 168명, 2022년 160명으로 연간 평균 159명꼴로 줄지 않고 있어 성범죄 경력 조회는 중요한 사항으로 꼽힌다.
가톨릭대의 서울성모병원 등을 운영하는 가톨릭중앙의료원은 가장 최근 발표된 감사 결과인 2022년 교육부 조사에서 9명의 직원이 20개 유흥업소에서 총 71차례에 걸쳐 법인카드나 연구비로 6151만 원을 결제한 사건이 적발됐다. 일요신문 확인 결과 1차례에 100만 원 이상 쓴 사례만 24차례에 달했다.
고려대와 연세대 병원에서는 출신 대학에 따른 채용 차별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비교적 오래 전인 2020년 결과지만 두 대학은 400∼600명의 입사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출신 대학을 수학능력시험 평균 성적에 따라 A∼E등급으로 나눴고, 이에 따라 서류심사 점수를 차등적으로 부여했다.
교육부는 최근 전북대와 중앙대 등의 병원을 대상으로 감사를 벌여 현재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국립대는 훈령에 따라 3년 주기로 감사를 진행하고, 사립대는 특정 문제가 발견됐을 때 주로 감사를 벌인다"며 "지적 사항이 개선됐는지 여부도 확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