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영역에는 도덕, 형이상학, 철학, 종교 등이 들어갈 듯하다. 그에 따르면 이런 것은 언어로 표현하고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게 좋다. 아마도 사람의 관점이나 풍습,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상대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대로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 등이 해당될 듯싶다. 이는 법칙이나 수치로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책을 읽으면서 이 구분법을 문득 노후설계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설계 혹은 은퇴설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행복설계요, 또 하나는 자산설계다.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면 말할 수 없는 것은 행복설계일 것이다. 행복은 개인마다 느끼는 감정이 서로 다르다.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기보다 주관적인 효용으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거칠게 말해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노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 도심에서 작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 귀촌·귀농을 선택하는 사람, 은퇴이민을 떠나는 사람, 한적한 근교에서 카페를 차리는 사람…. 그래서 은퇴 이후의 삶은 마치 바람 부는 들판에 흩뿌린 종잇조각처럼 각자 자신 나름의 삶을 꾸려가게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우리나라에서 행복은 5100만 가지가 있을 것이다. 누가 ‘은퇴 이후 행복을 찾기 위해선 이렇게 살아라’라는 조언을 해도 가슴 깊숙이 다가오지 않는다. 은퇴 이후 이상적인 삶은 몇 가지로 일반화하기 어려울 만큼 각양각색인 데다 내가 원하는 삶과도 편차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행복설계는 모범 답안이 없다는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답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노후 자산을 설계할 때는 정형화된 모델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객관화된 기준이 존재한다고 본다. 자산설계는 돈이나 재산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관한 얘기다. 남의 행복설계에 대해선 가타부타해선 안 되지만 자산설계는 다르다.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영역이다.
자산설계는 일종의 투자영역이므로 나의 선호뿐만 아니라 타자의 선호까지 고려되어야 한다. 때로는 타자의 선호에 더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욕망을 더 욕망해야 한다는 얘기다. 부동산 문제로 한정해 보면 교외에 전원주택을 짓는 것은 행복설계의 전형이다. 전원주택은 자산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행복을 위해 짓는 것이다. 저 푸른 언덕에서 집을 짓고 나만의 건강과 웰빙을 누리는 공간이다. 하지만 자산설계 측면에서 보면 가치가 평가절하 된다. 나중에 저출생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 충격이 오면 타격을 심하게 받을 수 있어서다. 대도시 주택보다는 먼저 빈집이 될 가능성도 있다.
사실 돈이 많은 자산가는 전원주택을 짓든, 별장을 짓든 크게 상관없다.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니 기호식품처럼 즐기면 된다. 하지만 자금력이 튼실하지 않은 서민이나 중산층의 경우 신중해야 한다. 한정된 재산의 효율적 분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산설계 관점에서 도심의 부동산을 다 처분하고 전원행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굳이 전원행을 선택한다고 하면 강력한 ‘필요’가 있어야 한다. 건강이 나빠져 휴양한다든지 등의 이유 말이다. 자산설계 측면에서 전원주택을 소유하기보다 임대해서 쓰는 게 좋다. 요즘 유행하는 여러 휴양지를 찾아 체험하는 ‘한 달 살기’를 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서에 대한 것이다. 부동산 영역에서 노후설계는 자산설계를 먼저 고려하고 그다음 행복설계를 하는 게 좋다. 전원주택부터 덜컥 지으면 나중에 되팔기도 어렵다. 순서를 잘 지켜야 노후설계도 꼬이지 않는다.
박원갑 박사는 국내 대표적인 부동산 전문가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부동산학 석사, 강원대 부동산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경제TV의 ‘올해의 부동산 전문가 대상’(2007), 한경닷컴의 ‘올해의 칼럼리스트’(2011)를 수상했다. 현재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책 자문위원이다. 저서로는 ‘부동산 미래쇼크’,‘ 한국인의 부동산 심리’ 등이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