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표결서 17표 이탈 땐 거부권 무력화…‘부결 당론 채택’ 추경호 리더십 첫 시험대
윤석열 대통령이 ‘순직해병 수사방해 및 사건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는 5월 21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채 해병 특검법’ 재의요구안을 의결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정부의 재의요구안을 재가하면서 채 해병 특검법은 국회로 돌아가 재의결 절차를 밟게 됐다.
대통령실 정진석 비서실장은 거부권 행사 배경으로 ‘헌법정신 부합하지 않는다’ ‘특검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수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등 3가지 이유를 들었다. 정진석 실장은 “윤 대통령은 이미 수사를 지켜보고 봐주기 의혹이 있거나 납득이 안 될 경우 먼저 특검을 주장하겠다고 밝혔다”며 “채 상병의 안타까운 사망이 더 이상 정쟁의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국회의 신중한 재의를 요청드린다”고 당부했다.
이로써 윤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동안 거부권 행사 법안 10건을 기록하게 됐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30여 년간 행사된 거부권 9건(노무현 전 대통령 6개·이명박 전 대통령 1개·박근혜 전 대통령 2개)보다 많은 횟수다.
야권은 반발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기본소득당·새로운미래·정의당·진보당 등 6개 야당은 5월 21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시민사회단체와 공동으로 ‘해병대원 특검법 재의요구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라고 (지난 대선 기간)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말했다. 윤 대통령은 범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백한 것”이라며 “범인임을 자백했으니 이제 범인으로서 그 범행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윤 대통령은 검찰독재에 더해 행정독재로 가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며 “윤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이승만의 말로를 기억하라”고 경고했다.
박지원 당선인은 자신의 SNS를 통해 “거부권 행사로 탄핵의 마일리지가 쌓였다”며 “국민과 야당은 ‘윤석열 탄핵열차’에 탑승할 준비가 됐다. 출발신호를 기다린다”고 직접적으로 ‘탄핵’을 거론하기도 했다.
국회는 5월 28일 21대 국회 임기 마지막 본회의에서 채 해병 특검법 정부재의안에 대해 재표결을 할 계획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22일 “가능하면 여야가 합의해서 일정을 마련하고 본회의를 소집해야 하지만, 만일 합의가 안 되더라도 28일 본회의를 열겠다”며 “이미 본회의에 올라와있는 안건과 재의를 요구한 채 상병 특검법은 표결을 통해 최종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재의결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때는 처음 표결과 달리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다. 의원 개개인이 어떤 표를 던졌는지 알 수 없다. 현재 국회 구성을 봤을 때 표결 참여 가능 의원 총 295명이 모두 참석하고, 민주당 포함 범야권 의원 180명 전원이 ‘찬성’한다고 가정할 때, 여당 의원 113명 중 17명 이상이 ‘가결표’를 던지면 통과된다.
정부여당에서는 집안 단속에 비상이 걸렸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의 첫 시험대가 됐다는 평가도 뒤를 잇는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5월 21일 “윤재옥 전 원내대표와 내가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다 접촉하고 있다”며 “단일대오에 큰 이상기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만일의 사태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추 원내대표는 23일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채 해병 특검법을 재표결에 부치겠다고 밝힌 김진표 의장을 향해서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 절차에 관한 여야 간 논의도 없었는데 국회의장이 앞장서서 본인이 상정을 선언한 것은 독단적인 국회 운영이 아닐 수 없다”며 “정치 역정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라도 중립적인 국회 운영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추 원내대표는 중진의원 간담회를 마치고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에 반대 입장을 당론으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당이 당론을 정할 때 통상적으로 거치는 공개 의원총회 개최 및 토론을 이번에는 생략했다.
국민의힘 원내지도부 한 관계자는 “추 원내대표가 기존 특검법 부결에 대한 당의 기존 입장을 다시 명확히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8일 본회의 이전 의원총회 개최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야권 한 관계자는 “섣불리 의원총회를 열었다가 재의결에 찬성하는 의원들이 나와 공개발언을 하면, 당내 분란으로 비춰질 수 있다”며 “국민의힘 내 특검법 찬성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의원총회도 열지 않는 비정상적인 당론 채택이 나온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여당 내에서도 공개적으로 재표결에 찬성하겠다고 손을 든 의원들이 나왔다. 안철수 유의동 김웅 의원 등 세 명이다. 한동훈 비대위에서 정책위의장을 지낸 유의동 의원은 5월 21일 SBS 유튜브 ‘스토브리그’에 출연해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해 “특검법을 받지 못할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찬성표를 던질 것이냐’는 질문에 “생각이 그런 쪽으로 가 있다”고 밝혔다. 유 의원은 “이걸 받았을 때 우리가 얻는 게 잃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 아닌가”라며 “대담하게 받고 결과를 보여주면 민주당이 더 어려운 상황으로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웅 의원은 5월 22일 자신의 SNS에 채 해병 특검법 부결 당론 채택에 대해 “당론이란 것은 힘없고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당의 운명을 걸고 세워야 하는 것”이라며 “국민의 힘이 돼야지 국민에 힘자랑해서야 되냐”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따위 당론, 따를 수 없다”며 “섭리가 우리를 이끌 거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앞서 김 의원은 지난 2일 채 해병 특검법 본회의 표결에서도 국민의힘 의원들 집단 퇴장에도 홀로 남아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안철수 의원 역시 21일 YTN라디오 ‘뉴스파이팅 배승희입니다’ 인터뷰에서 “채 상병 특검법 찬성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이탈표가 아닌 소신투표”라고 밝혔다. 안 의원의 경우 첫 표결을 앞두고 각종 인터뷰에서 채 해병 특검법에 찬성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5월 2일 본회의에서는 국민의힘 의원들과 함께 퇴장해 기권표를 행사했다.
여당 내 22대 총선 낙선·낙천·불출마 의원 58명 중 추가적으로 이탈자가 나올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웅 의원은 “찬성 의사를 밝힌 의원이 5명”이라며 “여당 이탈표가 약 10표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낙선자들은 본회의에 출석하지 않음으로써 의사표시를 드러낼 수도 있다. 출석 의원이 적어지면 의결 정족수가 줄어 재의결에 필요한 찬성수가 적어지기 때문.
민주당에서도 약한 고리를 공략하고 있다. 특검법을 대표발의한 박주민 의원은 국민의힘 의원 전원에 ‘표결은 무기명으로 진행된다’며 ‘국민을 위해 양심에 따라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에 찬성표를 던져 달라’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은 이탈표 방지 방안에 고심하는 모습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모수가 줄어드는 걸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힘 의원들이 전원 출석은 해야 한다. 추경호 원내대표도 의원들에 마지막 본회의 출석은 다 약속 받은 것으로 안다”며 “문제는 투표가 무기명이라는 점이다. 기표소 안에서 어떤 표를 던질지 장담할 수 없다. 이에 당 지도부에서 본회의 출석은 하되 재표결이 시작되면 의원 전원이 가만히 앉아 기표소에 들어가지 않는 방법도 검토 중인 것이라고 한다”고 귀띔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국회 본회의는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이탈표를 막기 위해 의원들을 투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모습이 영상으로 다 찍힐 것이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반문했다. 이어 “이탈표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여당에서도 채 해병 특검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정적으로 알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이 결국 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채 해병 특검법은 윤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 존폐가 결려 있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여당 의원들이 소신에 따라 찬성을 던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앞서 여권 관계자는 “채 해병 특검법이 재의결되면 사실상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국면으로 돌입한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다시 한 번 보수진영이 궤멸을 겪을 수 있다.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찬성표를 던지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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