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4차례 수사하고도 “피의자 특정 불가” 종결…‘추적단 불꽃’ 대화방 2년 잠입 유인작전 성공
#가해자 “신고해도 못 잡아”
5월 21일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허위영상물 제작 및 유포 등의 혐의로 서울대 졸업생 40대 남성 박 아무개 씨와 30대 남성 강 아무개 씨 2명을 4월 11일과 5월 16일 각각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2021년 7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약 3년 동안 딥페이크 등의 합성 기술을 이용해 서울대 동문 12명을 대상으로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이를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사건이 처음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024년 1월 탐사보도 매체 ‘셜록’을 통해서다. 2021년 7월 피해자 A 씨는 영화표 예매 정보를 얻기 위해 텔레그램을 설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부터 이상한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송된 사진과 영상 파일은 자신의 얼굴에 나체 여성의 몸을 합성한 수십 개의 허위 영상물, 이른바 딥페이크 성착취물이었다.
이렇게 조작된 사진과 영상은 A 씨의 신상정보와 함께 공범들이 모인 단체방에 퍼졌다. 단체방 참가자들은 ‘이번 시즌 먹잇감’이라며 성적 조롱을 일삼았고 박 씨는 이 단체방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 A 씨에게 보내면서 “대화방으로 들어오라”고 압박했다.
A 씨는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신고하게? 신고해도 나 못 잡아.” A 씨가 고소장을 쓰는 와중에도 메시지와 성착취물은 계속해서 도착했다. 결국 A 씨는 15년 동안 쓰던 휴대전화 번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피해자가 비단 A 씨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2022년 6월 한 카페에서 같은 학과 동기를 만난 A 씨는 또 다른 피해자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확인된 피해자는 약 20명.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이 가운데에는 서울대 로스쿨을 졸업한 이도 있었다.
여기서 또 다른 주범 강 씨가 등장한다. 경찰에 따르면 범행 당시 서울대 로스쿨에 재학 중이었던 강 씨는 피해자들의 졸업사진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진으로 성착취물을 만든 뒤 피해자의 신상정보와 함께 박 씨에게 넘겼고, 박 씨는 이를 텔레그램 단체방에 유포하고 일부 피해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접근했다.
일면식이 없던 두 사람은 텔레그램에서 만나 함께 범죄를 저지르며 친분을 쌓았다. 두 사람은 “우리는 한몸”이라고 지칭하는가 하면 서로를 “합성 전문가”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박 씨는 48명, 강 씨는 28명의 여성을 상대로 딥페이크 성범죄를 저질렀다. 특히 박 씨가 제작한 딥페이크 합성물은 100여 건, 유포 및 소지한 성착취물은 1700여 건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고등법원까지 가서야 재정신청 인용
문제는 경찰이 해당 사건을 네 차례나 수사하고도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피해 사실을 인지한 피해자들은 2021년 7월부터 서울 서대문, 강남, 관악, 세종경찰서에 신고했으나 경찰은 ‘텔레그램은 익명성이 강해 피의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를 중지하거나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신고를 위해 경찰서를 찾은 A 씨는 경찰로부터 “아, 텔레그램 못 잡는데”라는 말을 들었다고도 했다.
결국 피해자들은 스스로 가해자를 찾아나섰고 딥페이크에 사용된 사진이 모두 자신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서로의 연락처 목록을 대조해 자신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가지고 있는 단 한 명 B 씨를 추려냈다. 그 역시 서울대 동문이었다.
어렵게 모은 증거들을 가지고 다시 경찰서를 찾았지만 6개월 뒤 경찰은 “범죄 혐의점이 없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피해자들은 검찰에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을 제기했으나 서울중앙지검은 사건을 기각했다. 서울고검에도 항고해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법원이었다. 검찰의 불기소 결정이 정당한지 봐달라는 취지의 재정신청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11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은 피해자들의 재정신청을 인용했다. 혐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공소 제기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재판에 통상 재정신청 인용 확률은 1% 내외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2023년 12월 경찰청 국가수가본부는 관련 사건을 재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서울청 사이버수사대가 다시 수사에 착수해 박 씨 등의 피의자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앞서의 B 씨는 박 씨와는 다른 인물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수사가 미진했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경찰 관계자는 “국수본에서 자체적으로 문제점을 인식해 재수사를 지시한 것으로 기존 수사가 미진했던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서울경찰청이 가진 여러 수사기법, 민간과의 협업 등을 통해 끈질기게 수사했고 어렵게 검거했다”고 덧붙였다.
#세 번째 거래일에 현장 검거
박 씨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추적단 불꽃의 ‘단’이자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의 에디터로 활동 중인 원은지 씨였다. 원 씨는 30대 남성으로 위장해 2년 가까이 박 씨와 친분을 이어오며 신뢰관계를 쌓았고 이를 토대로 실제 만남을 유인했다.
그는 2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마치 ‘지인 능욕 범죄’에 동참하려는 남성인 것처럼 연기했다”며 “(가해자가) 서울대와 아내가 있다는 말에 반응했기 때문에 30대에 미모의 아내가 있는 가장의 역할을 했었다”고 밝혔다.
이어 “박 씨가 (아내의) 속옷 사진을 계속 요구하다가 나아가서는 가지고 싶다는 의향을 드러냈다”며 “그때 바로 수사관에게 ‘오프라인으로 불러내보면 어떨까’ 했더니 ‘오프라인에 나오면 무조건 잡는다’고 해서 오프라인으로 팬티 거래를 했다”고 설명했다. 약속 장소는 서울대입구역이었다.
결국 박 씨는 세 번째 거래일이었던 2024년 4월 3일 현장에서 체포됐다. 체포까지 세 번의 거래가 필요했던 이유에 대해 원 씨는 “속옷을 가지러 온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그 주범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고, 체포영장이 나오는 데까지 1~2주가 걸린다”며 “첫 번째 거래 때 체포영장 발부를 위한 단서를 잡았고 1~2주 뒤 마지막 거래 때 현장의 경찰이 검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박 씨 외에 또 다른 공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법은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 하고 있다. 생성형 AI(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딥페이크 성범죄가 늘어나면서 2020년 딥페이크를 이용한 성범죄 처벌법이 도입됐으나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사례는 많지 않다. 다수의 딥페이크 성범죄가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벌어져 피의자가 특정되지 못했거나 설령 잡혔다고 해도 수사 기관이 해당 성착취물이 ‘반포’를 목적으로 제작됐는지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에 따르면 반포할 목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허위 영상물을 제작하거나 퍼뜨리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 영리 목적일 경우 7년 이하 징역으로 가중 처벌을 받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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