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래 부르는 김호중을 좋아한다. 그는 노래를 참 잘한다. 마음을 노랫가락에 실어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축복받은 능력이다. 그가 집중하여 노래를 하면 어찌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운명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운명이 나를 안고 살았나, 내가 운명을 안고 살았나. 굽이굽이 살아온 장마다 가시밭길 서러운 내 인생, 다시 가라 하면 나는 못가네. 마디마디 서러워서 나는 못가네. 지는 해에 실려 보낸 내 사랑아, 바람처럼 사라져간 내 인생아….”
그가 부르는 ‘인생’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누구나 마디마디 서러워 못산다고 투정부리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또 살면서 우리는 배우게 된다. 인생은 결코 투정과 엄살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숙하고 어리석은 시간에서 진실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면 생은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 사고가 나기 몇 주 전, 예능 프로그램 ‘미우새’에 김호중이 나왔다. 나는 그가 집에서 거의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발목이 불편했던 것이다. 공연하다보면 가끔씩 발목에서 소리가 나고, 자지러질 정도로 아프다고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정으로 어떻게 사는데 제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사는가. 젊고 에너지가 있으니 견디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분명 번아웃의 증거였다. 저렇게 계속 살면 어떻게 될까, 그는 돈 버는 기계가 아닌데.
생각을 바꾸면 구치소의 시간도 꼭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사고를 내고 도망치듯 부리나케 현장을 떠난 것을 보면 그때 그 시간, 그는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짓말들…. 그가 얼마나 초조했고 두려워했으며 무서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고, 두려움에 끌려 다니느라 두려움을 다룰 마음의 힘을 놓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같다. 카르페디엠, 흔히들 ‘현재를 즐겨라’라고 번역하지만, 그것이 어찌 먹고 마시고 놀라는 말이겠는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니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끌어 들여 현재를 오염시키지 말고, ‘현재’에서 답을 구하고 ‘현재’에 머무르라는 뜻일 것이다.
노래 부를 때 집중하는 그의 면모를 보면 그는 분명 카르페디엠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팬으로서 나는, 그 씨앗이 지금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못생기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두려울 때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두뇌게임을 하려들지 말고,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알아챈 후 진정시키기를. 알지 않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만 두려움을 알아채면 거기에서부터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식사가 나오면 먹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할 일이 없는 듯 먹는 일에 집중하기를.
조사관이 조사를 하면 좋은 인상을 주려 노력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진술할 수 있기를. 욕하면 욕을 먹고, 울고 싶으면 울고, 답답하면 심호흡을 하고, 졸리면 자기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에 귀를 기울이며 그 감정들이 어떻게 찾아왔다가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 그저 관찰할 수 있기를. 무엇보다도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도 말고 그 감정들을 붙들려고도 말고 흘려보내려고도 말기를.
언제 그가 그렇게 밤의 어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겠는가. 밤의 어둠을, 어둠 속의 침묵을. 침묵과 함께 조용히 잠드는 일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기를. 그러다 보면 구치소의 시간도 마음 학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