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보·위너스텝 등 홍콩 회사끼리 건물·토지 사고팔아…권 회장 장모가 창건, 권 회장 “나하고 무슨 상관 있나”
삼각산(북한산)에 ‘문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문수암 신도였던 법왕궁 보살은 우연히 암자 근처에서 범음(종소리)을 들었다. 가봤더니 종은 없었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무엇인가 끌어당기는 기운을 느낀 법왕궁 보살은 이곳이 평생 안락지임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한다.
법왕궁 보살은 삼각산 문수봉이 보이는 계곡 한쪽 언덕바지에 5000여 평 땅과 산지를 매입해 문수도량을 세웠다. 이 도량에서 불심을 키웠고,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불도량을 지켜가도록 했다. 구기동 언덕에 위치한 삼각산 문수원이 생겨난 비화다. 이 스토리의 시대적 배경은 21세기다.
문수원 창건자인 법왕궁 보살은 2013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인 해동성 보살이 얼마 전까지 문수원 신도회장으로 모친의 유지를 받들어 온 것으로 파악된다. 2018년 삼각산 문수원은 대한불교 태고종에 정식 입종했다.
부동산등기부에 따르면 문수원 토지는 2002년 10월 30일 박 아무개 씨(법왕궁) 딸인 ‘해동성 보살’ 김 아무개 씨가 구매했다. 5개월 뒤인 2003년 3월 17일엔 어머니 박 씨가 딸 김 씨로부터 토지를 샀다.
문수원 사찰 건물이 완공된 시점은 2008년 10월경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문수원 건물이 완공되기 전 토지 소유주가 바뀌었다. 새로운 소유주는 홍콩에 거점을 두고 있는 투자 회사 멜보인터내셔널인베스트먼트리미티드(멜보)였다(관련기사 [단독] “탈세의 교과서” ‘선박왕’ 권혁의 시도그룹 지배구조 해부).
2007년 12월 30일 멜보는 법왕궁 보살로부터 문수원 토지를 구매했다. 건물이 완공된 뒤 건물 소유주는 멜보가 아니었다. 건물 지분은 2분의 1로 나뉘어 절반은 주식회사 시도항공여행사, 절반은 또 다른 김 아무개 씨 소유로 등기됐다. 김 씨는 시도항공여행사 대표로 등기된 이력이 있었다. 문수원 토지주인 멜보는 2012년 11월 김 씨가 가지고 있던 건물 지분을 매입했다.
3년 뒤 멜보는 건물 지분은 그대로 유지한 채 토지를 다른 기업에 팔았다. 2015년 6월 위너스텝인베스트먼트리미티드(위너스텝)라는 홍콩 투자회사가 멜보로부터 문수원 토지를 매입했다. 이로써 위너스텝이 문수원의 새로운 토지주가 됐다.
그런데 2016년 4월 이전 토지주였던 멜보는 시도항공여행사가 보유한 건물 지분 50%를 매입했다. 문수원 건물은 멜보, 토지는 위너스텝이 보유한 사찰이 됐다. 건물주와 토지주가 다른 데다, 각각 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부분이 흥미롭다. 더구나 홍콩 기업이 토지와 건물을 나눠가진 재산의 정체가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라는 점은 상당한 미스터리였다.
2017년 11월 멜보가 위너스텝에 건물을 팔았다. 건물과 토지 주인이 위너스텝으로 같아졌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20년 6월 19일 서울특별시 세금징수과가 문수원 건물과 토지를 압류했다.
일요신문 취재에 따르면 서로 건물과 토지를 사고팔며 나눠 가지기도 했던 두 홍콩 기업 멜보와 위너스텝 사이 의미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했다. 홍콩 현지 소재 두 회사 사무실 주소와 층수가 같았다. 두 회사 대표자도 동일인이었다. 대표자는 일본 국적자 A씨로 확인됐다(관련기사 [단독] 선박왕 재산 이동 ‘새 브리지’? 홍콩 기업 위너스텝 미스터리).
문수원 건물 근저당권을 가지고 있던 기업들도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시도카캐리어서비스리미티드(CCCS), 시도쉬핑 홍콩 등 시도그룹 핵심 계열사들이 문수원 건물 근저당권자였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시도그룹은 글로벌 조세 회피처로 유명한 영국령 케이맨제도, 바하마 등에 명의신탁을 통해 기업군을 보유하고 있다. CCCS와 시도쉬핑 홍콩 등 실소유주로 지목되는 인물은 권혁 회장이다. 문수원을 사고팔았던 위너스텝과 멜보는 CCCS, 시도쉬핑 홍콩 등 시도그룹 핵심 계열사와 사무실 주소가 같았다.
위너스텝과 멜보는 한국 소재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위너스텝은 한국에 K 사, 위너스텝 코리아, L 사 등 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멜보는 시도쉬핑 코리아, 대상중공업, 유도쉬핑 등 자회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너스텝은 문수원 토지와 건물 소유권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위너스텝 국내 기업인 위너스텝코리아 지분은 32% 보유하고 있다. 위너스텝 코리아 대표이사인 권 아무개 씨는 시도그룹 보험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권혁 회장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권 씨는 시도그룹 산하 계열사로 거론되던 다수 기업 대표이사로 재직한 이력이 있다.
그런 권 씨는 또 다른 직함을 갖고 있다. 문수원 고유번호증에 따르면 권 씨가 문수원 대표자로 명시돼 있었다. 권 씨는 문수원 신도들에게 ‘문수원 원장’으로 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12월 23일 삼각산 문수원에선 동지법회가 열렸다. 이날은 동지법회와 함께 신도회장 이취임식이 열렸다. 문수원을 설립한 창건주 법왕궁 보살(박 씨) 딸인 해동성 보살(김 씨)이 신도회장 직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신도회장이 취임했다. 문수원 원장인 권 씨는 신임 신도회장에게 임명장과 꽃다발을 전달했다.
그리고 전임 신도회장인 해동성 보살과 ‘가산’이라는 법명을 쓰는 인물이 신임 신도회장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가산은 낯익은 인물이었다. 바로 권혁 회장이었다. 권 회장은 신도회장 이취임식에서 마이크를 잡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권 회장과 해동성 보살은 부부 관계인 것으로 확인됐다. 문수원 창건주인 법왕궁 보살 박 씨는 권 회장 장모였다.
문수원 부동산등기부상 수많은 거래 흔적은 권혁 회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사실상 권 회장 일가가 보유하고 있던 건물과 토지를 홍콩 기업이 구매한 셈이었다. 홍콩, 바하마, 케이맨제도 등 세계 곳곳에 위치해 있는 문수원 소유주의 역학관계를 추적해보면 그 꼭대기에 권 회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 권 회장이 역외 탈세 혐의 항소심 재판을 받을 당시 검찰 측이 제시한 ‘별지’에 따르면, 멜보는 2007년 12월 30일 권 회장 일가가 보유한 구기동 소재 토지를 일제히 매입했다. 문수원 부지다.
권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구기동 토지 2필지 면적은 2240㎡, 권 회장 부인 김 씨가 보유하고 있던 토지 2필지 6260㎡, 권 회장 장모 박 씨가 보유하고 있던 구기동 토지 2필지 2222㎡ 등이었다. 서류상 세 사람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 면적을 합치면 1만722㎡ 규모다.
일요신문은 6월 4일 문수원을 방문했다. 북한산이 바로 보이는 절경이었다. 문수원 대웅전 뒤로는 산책로 같은 정원 공간이 조성돼 있었다. 문수원 경내엔 사찰과 어울리지 않는 빌딩도 건립돼 있었다. 빌딩 1층은 비어 있었고, 3층엔 회의실로 보이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빌딩 소유주는 시도쉬핑 홍콩이었다.
일요신문이 확보한 ‘시도쉬핑 홍콩 회장’ 직함을 단 권혁 회장 명함에 따르면, 권 회장 명함에 기재된 사무실 주소는 위너스텝, 멜보, CCCS 등 핵심 계열사 법인등기부등상 홍콩 현지 사무실 주소와 같았다.
문수원엔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보이는 안내문구가 많았다. 문수원 입구엔 이곳이 멧돼지 상습출몰 지역이며, 사냥개가 두 마리 풀려있다는 경고 문구가 있었다. 산책길과 등산로가 없다는 안내문구가 적혀 있었다. 문수원 경내에는 개조심 팻말도 세워져 있었다. 경내로 잠시 들어가 보니 진돗개 두 마리가 삼엄한 경비를 서듯 크게 짖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문수원 실소유주는 선박왕 권혁 회장”이라면서 “재산 은닉과 탈세 및 횡령 목적 자금 이동 창구로 문수원이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찰이라는 종교 시설을 ‘탈세 및 횡령 브리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지배 구조가 아직 베일에 가려진 위너스텝이 상대적으로 지배구조가 공개돼 있는 멜보로부터 문수원 소유권을 구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제보자는 “한국 내에선 종교재산이 세무조사 등에서 피난처처럼 인식되는 게 사실”이라면서 “2차 납세 의무자로 압류된 멜보 소유 공매 자산을 위너스텝이라는 홍콩 법인이 인수한 것은 또 다른 조세 회피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다”고 주장했다.
문수원 대표자인 권 아무개 씨는 일요신문 통화에서 “내가 문수원 대표”라면서 “위너스텝이 시도그룹 자회사인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위너스텝이 문수원 소유주 아니냐’는 질문에 권씨는 “잘 모른다”면서 “난 그냥 원장으로 돼 있고 여기(위너스텝코리아)도 그냥 대표이사”라면서 “(위너스텝코리아가) 페이퍼 비슷해 가지고 내가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문수원 실소유주로 지목되고 있는 권혁 시도그룹 회장은 통화에서 “문수원하고 내가 무슨 상관있느냐”고 말했다. ‘법회에 자주 참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내가 거기 법회에 왜 참석하느냐”고 반문했다.
‘배우자 김 아무개 씨가 문수원 신도회장이었다가 최근 그만두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권 회장은 “우리 집사람이 거기 신도회장 하다가 이번에는 좀 건강이 안 좋아서 그만두고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면서 “거기에 가끔은 들른다”고 해명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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