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건 9단이 올해 지지옥션배의 새로운 스타로 떴다. 양건은 지난 8일 저녁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8기 지지옥션배 신사 대 숙녀 연승대항전 9국에서 숙녀팀 5번 주자 김상인 3단을 꺾었다. 스미레 3단, 김민서 3단 전에 이은 3연승이다. 비록 이어진 대국에서 김혜민 9단에게 통한의 반칙패를 당하면서 허무하게 물러났지만, 50세 노장 양건의 활약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숙녀팀 스미레 3단이 신사팀 세 번째 주자 웨량 6단의 3연승을 저지했을 때만 해도 지지옥션배 초반 판도는 숙녀팀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스미레의 다음 상대는 양건 9단. 75년생(이창호 9단과 동갑이다)으로 2년 전 첫 출전했다가 조승아 6단에게 막혀 판 맛도 보지 못한 채 물러났던 그가 스미레를 잡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양건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미레를 상대로 단 한 번의 찬스도 주지 않고 완승을 거둬 본인을 포함해 지켜보던 모든 바둑팬들을 놀라게 했다.
바둑TV 해설의 양상국 9단은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면서 “나이가 들면 으레 승부처에서 흔들리기 마련인데 양건 사범이 마지막까지 정말 잘해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국 후 양건은 “초반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중반에 뭔가 한번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우세하다고) 기분을 내다가 상대가 버티니까 분위기가 싸해진 장면도 있었다. 거의 역전되는 것 아닌가 하는 순간도 있었고, 제가 언제 실수를 할지 몰라 상대가 던지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긴박했던 순간을 돌아봤다. 또 노장답지 않게(?) 시종 빠른 속도로 착점한 것에 대해선 “팀원 중 한 명인 목진석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대국 전 ‘초반엔 좀 빨리 두라’고 조언해 주었는데 충실히 이행했다”며 웃었다.
양건의 활약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양건은 이어진 김민서 3단과의 대국에서도 완승을 거둬 팀 동료들을 웃음 짓게 했다. 김민서 3단은 신예긴 해도 얼마 전 열린 여자바둑리그 드래프트에서 보령 팀 주장으로 뽑힌 실력파 기사. 그렇지만 양건은 김민서를 상대로도 236수 만에 10집반승을 거둬 스미레와의 대국이 운이 아니었음을 실력으로 보여줬다. 해설의 백성호 9단도 놀란 듯 “양건 9단이 승부가 아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뛰어난 기량을 지지옥션배에서 보여주고 있다. 양건의 재발견이라는 말도 나온다”고 높이 평가했다.
양건은 “저로선 뜻밖의 승리다. 스무 살 넘으면서부터는 바둑 공부에서 손을 놨다. 지난해부터 인공지능으로 공부하다 보니까 어릴 때 배웠던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인공지능의 수들에 감탄하면서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양건은 이어진 연승대항전 9국에서도 김상인 3단에게 승리를 거두고 이번 대회 최초의 3연승자가 됐다. 하지만 그의 퇴장은 조금 허망했다. 10일 열린 김혜민 9단과의 대국에서 다 이겨놓은 바둑을 돌을 따내다 시간을 넘기는 실수를 저질러 반칙패를 당하고 말았다. 박상돈 심판은 “양건 9단이 사석을 따낼 때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돌을 들어내야 했는데 상대방 시계를 눌렀기 때문에 반칙패가 됐다”고 설명했다.
종국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99% 이긴 바둑을 내준 셈이 됐지만 그럼에도 양건은 의연했다. 곧바로 승복하고 상대 김혜민과 태연하게 복기를 이어나갔고, 대국 내내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솔직하면서도 상대와 스폰서를 배려하는 겸손한 인터뷰는 “오랜만에 보는 시니어 기사의 귀감”이라는 팬들의 평가가 줄을 이었다.
김혜민의 승리로 5승 5패 균형을 맞춘 지지옥션배는 김혜민 9단과 박승철 8단의 대결로 이어진다. 상대전적에선 박승철이 김혜민에게 5승무패로 앞선다.
제18기 지지옥션배 선수 명단
[신사팀] 조한승, 목진석, 최명훈, 유창혁, 이창호, 박승철, 주형욱/(탈락)이정우, 최규병, 웨량, 최원용, 양건
[숙녀팀] 최정, 김은지, 김채영, 오유진, 조승아, 허서현, 김혜민 /(탈락)조혜연, 이나현, 스미레, 김민서, 김상인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