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전선로 통과지역 요구·갈등 중재하다 ‘수년’ 지연 우려…수백km 밖 동·서해안서 전력 끌어와야
정부는 지난 1월 발표한 ‘경기 남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방안’에서 2047년까지 민간기업 자본 622조 원이 투입돼 총 16개 반도체 ‘팹(생산시설)’이 신설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핵심지는 500조 원 가까이 투입되는 용인이다. SK하이닉스는 용인시 원삼면 일대 일반산업단지(416만㎡)에 122조 원을 들여 반도체 팹 4기를 건설, 2027년부터 가동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이보다 큰 용인시 남사읍 국가산업단지(728만㎡)에 360조 원을 투입해 반도체 팹 6기를 구축, 2030년부터 가동에 나설 예정이다.
정부는 용인 클러스터에서 5개 생산라인이 가동될 2042년쯤 7GW, 모든 시설이 가동되는 2050년엔 10GW 이상의 전력공급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현재 수도권 전체 전력수요(최대 40GW)의 ‘4분의 1’ 수준으로, 원전 10기(1기당 약 1GW)를 새로 지어야 조달 가능한 규모다.
당장 2027년부터 용인 일반산단(SK하이닉스)에 공급돼야 할 전력 2.83GW 공급라인 구축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다. 충남 당진·태안 등 서해안 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받는 ‘신안성변전소’와 용인 일반산단 사이 6km 송전망을 건설하는 공사가 현재 76%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추가 공급이 필요한 10GW 이상 전력 중 2036년 내 국가산단(삼성전자 클러스터)에 공급돼야 할 3GW는 일단 500㎿ 분량 LNG(액화천연가스)발전소 6기를 산단 내부에 지어 충당할 계획이다. 나머지 7GW는 화력발전·원전이 있는 동해안과 태양광·풍력발전이 몰린 호남·서해안을 각각 연결하는 이른바 ‘전력고속도로(HDVC·초고압직류송전)’를 건설해 조달할 계획이다. 경북 울진 한울원전에서 출발하는 ‘동해안~수도권 HDVC(총 230km)’는 2026년, 신해남~서인천(총 430km)·새만금~인천영흥(총 190km) 등 2개 경로로 이뤄진 ‘서해안~수도권 HDVC’는 12년 뒤인 2036년 준공 목표다.
전력 분야 전문가들과 정치권에선 앞선 수많은 사례를 주목하며 이들 송전선로 건설 지연을 걱정하고 있다. 2008년 경남 밀양에서 고압송전탑 공사가 극심한 지역주민 반대로 5년간 지체된 사태가 발생한 뒤 전국의 송·배전망 건설사업이 줄줄이 최소 1년, 길게는 10년 이상 지연되고 있다.
서해안 ‘북당진-신탕정 345㎸ 송전선로’는 당초 계획한 2012년에서 12년 밀린 올해 12월에나 완공이 예상된다. ‘당진화력~신송산 345㎸ 송전선로’는 2021년에서 2028년으로 7년, ‘동해안~신가평 500kV 송전선로’는 2019년에서 2026년으로 준공이 5년 밀릴 전망이다.
고압송전선로공사는 전자기파에 의한 건강 유해성을 우려하는 주민 여론, 인허가 지연을 활용한 지방자치단체의 비협조 등에 부딪혀 건설 단계부터 지연을 겪기 일쑤다. 밀양 송전탑 사태를 계기로 송·변전설비 인근 주민에게 보상·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 ‘송전설비주변법’이 2014년 제정돼 개정을 거듭했지만 경로 변경, 지중화, 보상금 상향 등 각종 요구에 부딪혀 갈등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하는 해안·해저 통과방식도 어민이나 인근 주민을 어렵게 설득, 보상금을 지급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보내기 십상이다.
송전선로 건설을 맡고 있는 한국전력공사(한전)는 지난해 12월 작성한 ‘전력망 건설의 새로운 갈등예방 프로세스 정립안’에서 “주민과의 갈등이 지자체·환경단체·국회(정치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확대돼 사업 지연 요인이 다양화·복잡화하는 양상”이라며 “갈등을 해결한 메커니즘이 부재해 한전의 노력만으로 건설 지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윤석열 정부는 송전선로(345kV 기준) 건설기간을 평균 13년에서 9.3년으로 30%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던지고, 송전망 인근 지역주민 보상·지원책과 각종 인허가 규제 완화책 등을 담은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을 추진했지만 지난 21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여야 모두 법안 취지에 공감했지만 크게 늘어날 주민보상비용을 정부나 지자체, 민간(송전망 수혜자) 중 누가 부담할지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특별법은 이번 22대 국회 개원 후 국민의힘 에너지위원회를 중심으로 재발의된 상태다. 정부가 현장의 갈등을 직접 중재하고, 여러 부처에 흩어진 인허가, 보상·지원 절차를 통합해 송전망 구축이 ‘패스트트랙’을 밟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고동진 의원(국민의힘 AI·반도체특별위원장)은 지난 10일 통화에서 “주민 갈등·보상이 가장 어려운 문제인데 적자가 한 해 45조 원, 누적 200조 원에 이르는 한전이 이를 모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많을 것”이라며 “정부가 직접 주도해 반도체 첨단시설에 들어갈 전력·용수 공급설비를 구축하고, 그 비용도 미국·일본·대만 등이 그렇듯 정부가 직접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현재 대만의 TSMC가 굉장히 공격적으로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있는데 관련 인프라가 미리 구축되도록 대만 정부가 잘 챙겨주고 있다”며 “우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가동이 늦어지면 여러 외국기업과 경쟁에서 금세 밀려 세계 3~4위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컨트롤타워로서 강력한 추진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 10일 통화에서 “(반도체 국가산단) 전력은 산업통상자원부나 한국전력 등 정부가 키를 쥐고 공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현재 전력공급과 관련해 정부와 회의에서 제안·협의되고 있는 세부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기업인 우리가 먼저 외부에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11일 ‘일요신문i’에 보낸 입장문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장거리 송전선로가 필요한 시점은 2037년 이후로 보고 있는데 표준 건설 기간이 9~10년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아직은 여유가 있지만 최근 송전선로의 적기 건설이 어려워지고 있어 공사에 조기 착수하면서 ‘국가기간 전력망확충 특별법’ 등 제도적 지원을 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전문가들은 자칫 장거리 전력공급망에 문제가 생겨 정전 사태가 날 경우 반도체 생산장비가 손상돼 막대한 손실과 복구 소요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상대적으로 설치에 제약이 적은 소형모듈원전(SMR)을 생산시설 주변에 설치하는 안 등 다른 대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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