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기보다 자기를 탐구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숙제는 사고 없이 처리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아 안전한 시민일 수는 있지만 ‘자기’도 없는 사람. 그러니 문을 걸어 잠그고 좌절과 절망을 곱씹는 시간이야말로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면? 그래서 좌절과 절망을 곱씹으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좌절과 절망이 되어버렸다면? 요즘은 그런 친구들을 은둔형 외톨이라 부르는데, 통계가 놀랍다. 서울 청년 중 약 13만 명이 이 은둔형 외톨이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명제다. 키르케고르의 ‘절망’은 단순한 좌절은 아니다. 오히려 세속적 성공에 취해 진정한 자아를 망각하는 일 또한 절망이다. 물론 세속적 성공은 그 자체로서는 부정적일 수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일을 통해 혹은 돈을 벌면서 세상에 속해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철학자 박찬국 교수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읽기’라는 책을 펴냈다. 아마 박 교수는 성과주의를 부추기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과도하게 질책하고 무시하는 사회로 인해 낙담하다 절망에 빠진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기획한 것 같다. 그는 키르케고르의 유한성의 절망, 무한성의 절망이라는 개념을 현실에 잘 접목시킨다.
세속적 성공에 취해 진정한 자아를 망각하거나 반대로 세속적 실패로 인해 낙담하다 불안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버린 사람의 절망을 유한성의 절망이라 읽고, 반대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답시고 공상적인 것으로 도피, 현실을 무시하며 고립을 자처하는 것을 무한성의 절망이라고 읽는다. 사실 무한성과 유한성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 몸일 것이다. 몸은 영혼의 보고(寶庫)다. 영혼 혹은 마음이 떠난 몸은 시신에 불과하지만 몸이 없는 영혼은 더 이상 세계 내 존재가 아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과제는 언제가 사멸해야 할 몸이 무한성의 통로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한한 이 몸은 무한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무한은 유한을 통해 자기를 계시한다. 유한성과 무한성은, 몸과 영혼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 연결이 끊어진 것이 절망인 것이다.
절망하여 자신 안에 힘이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젊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정말 필요해 보인다. 5월에는 CNN이, 6월 말에는 BBC가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를 조명했다.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목표를 도달하지 않으면 루저의 낙인을 찍어버리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조급한 한국사회가 은둔형 외톨이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삶이 너무 무겁고 버거워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식구에게 일어나 나오라고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나오고 싶을까, 나올 수 있을까. 학교나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손가락질하고 무시하는 우리의 버릇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직업이나 학벌, 수입에 서열을 매기고 실패나 실수에 관대하지 않는 우리의 성향이 숨 막히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은둔의 시간을 겪으며 강아지와 우정이 생겨 그 우정을 징검다리로 세상으로 나온 친구를 알고 있다. 때로 은둔은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생명이나 자연, 혹은 감각을 깨운다.
당신이 지금 은둔 중이라면? 괜찮다.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이제 당신의 방식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진통일 것이니.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