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돌려받기 요원한데 수리비까지 내가며 생활…임차인들 지자체에 호소하지만 법령 미비 대부분 손놔
#비 올 때마다 차단기를 내려야 하는 이유
11일 오후 방문한 경북 경산시 전세사기 피해자 석 아무개 씨(34) 주택. 아이와 함께 자는 안방에도 아이 놀이방에도 벽지에 곰팡이가 가득 올라왔다. 이미 약을 바르고 벽지로 한 번 덮었는데 그 위로 또 곰팡이가 번지고 있다는 것이 석 씨의 설명이다. 화장실 하수구와 싱크대에서는 코를 찌르는 꿉꿉한 악취가 올라왔다. 임대인이 관리비를 미납해 관리업체가 계약을 해지하면서 오·폐수를 퍼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누수 문제도 심각하다. 비가 올 때마다 콘센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석 씨는 전기 사고가 날까 두려워 비가 올 때마다 차단기를 내린다.
석 씨는 “아이랑 자는 안방 화장실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자다가도 깰 정도다. 안방 화장실은 아예 안 쓰고 있고 공기청정기도 화장실 문 앞으로 옮겼다”라며 “샤워기에서 물이 줄줄 새고 거울도 떨어져 나갔는데 그건 사비로 고쳤다. 근데 곰팡이를 잡으려면 누수가 시작되는 옥상부터 건드려야 하는데 단 한 번도 방수 처리를 하지 않은 곳이라 수백만 원이 필요해 엄두도 못 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공용공간도 말썽이다. 주택 공동현관의 자동문 센서가 고장이 나면서 도어락은 무용지물이 됐다. 조명도 들어오지 않아 대낮에도 어둑어둑한 복도를 어렵사리 지나다녀야 한다. 도주한 임대인과는 연락이 닿질 않아 수리를 요구할 곳도 없는 상황이다.
같은 다가구주택에 거주하는 박 아무개 씨(27)와 장 아무개 씨(26) 또한 주택 관리 부실로 고통받고 있다. 박 씨와 장 씨가 떼인 전세보증금은 각각 1억 4000만 원과 5500만 원. 파산을 준비 중인 임대인은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다며 주택 관리에서 손을 뗐다. 임대인이 관리업체에 계약 해지를 요청하면서 엘리베이터도 완전히 멈춰버렸다. 장 씨가 올해 1월에 확인했을 때 수도는 이미 6개월, 전기는 3개월, 인터넷은 2개월가량 요금이 미납된 상태였다. 집집마다 있는 화재 감지기도 고장났지만 속수무책으로 방치되고 있다. 장 씨는 “불편한 것을 넘어서 위험한 상황인데 아무도 우리 문제에 관심이 없다. 이러다 사고가 나서 누구 하나는 죽어야 이슈가 될까 싶다”라고 토로했다.
박 씨는 “5층짜리 주택인데 엘리베이터가 안 움직여서 너무 불편하다. 배달은 아예 못 시키고 있고 택배도 1층까지 가서 들고 와야 한다”며 “엘리베이터를 다시 가동하려면 안전관리 교육을 이수한 안전관리자가 필요하고 만만치 않은 부품 교체 비용도 대야 하는데 우리 건물에는 대부분 대학생들이 지내고 있어 쉽지 않다. 안전관리자가 없어서 안전점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곧 300만 원가량의 과태료도 물어야 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대구 북구 침산동에 거주하는 정 아무개 씨 역시 주택 내부 누수와 공용공간 침수로 고통받고 있다. 정 씨가 거주하는 주택에서는 장마철만 되면 엘리베이터 안으로 비가 새기 때문에 물받이를 받쳐 놓고 시간대별로 확인하면서 물을 비워야 한다. 한번은 PCB(인쇄회로기판)에 물이 들어가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는 바람에 임차인들이 500만 원가량을 지출해 수리를 하기도 했다. 임대인이 사기 혐의로 구속되면서 현재 20세대의 임차인들이 엘리베이터 두 대의 관리 비용과 건물 청소비용, 소방안전 관리비용으로 한 달에 120만~130만 원가량을 나누어 내고 있다.
정 씨는 “가뜩이나 비가 새서 바닥이 미끄러운데 고층부에 머무는 가족들이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사고가 날까 봐 갹출해서 엘리베이터를 수리하고 주택을 관리하고 있다”라며 “보증금을 떼인 상황에서 사비로 사기당한 주택의 관리와 수리까지 도맡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말했다.
부산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한 오피스텔 역시 지난해 7월 폭우로 도로 빗물이 지하실로 쏟아지면서 소방펌프가 침수 돼 큰 피해를 입었다. 신상헌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 공동위원장은 “건물에 유지관리 시설이 대부분 지하실에 있었는데 침수로 다 고장이 나버리는 바람에 2000만 원가량의 수리비가 나왔다. 피해자 분들도 생활을 하셔야 하니까 결국엔 22세대가 갹출해서 지금도 수리비를 계속 분할납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며 “지금도 장마철이고 비가 많이 오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알 수가 없으니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지자체 손 놓아…보완 입법 시급 목소리
소방·전기·주차 시설이나 승강기는 법적으로 안전관리 의무가 부과된다. 원래는 임대인이나 관리 업체에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전세사기 피해주택에서는 임대인의 도주나 구속 등으로 관리자가 부재해 임차인에게 책임이 전가된다. 임차인이 안전관리 교육을 이수받고 안전관리자로 선임된다고 해도 만약 사고가 발생해 책임소재를 가려야 할 경우 안전관리자가 행정처분을 받게 될 수도 있어 쉽게 나서기도 어렵다.
이철빈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임차인이 안전관리자 교육을 받을 수는 있지만 건물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화재 보험이나 승강기 안전 보험은 또 가입이 안 되는 문제도 있다”며 “안전 관리 시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 분들이 결국에 사비를 들여 수리를 하시게 되는데 이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임차인들이 지자체에 도움을 구하고 있지만 경기도와 부산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정부기관에 책임을 떠넘기거나 다른 지자체의 조례를 참고해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듣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근거 법령이 미비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세사기 피해주택은 크게 공동주택과 단독주택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공동주택의 경우 공동주택관리법에 따라 지자체장이 안전 점검을 포함해 주택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다. 그런데 다가구주택 등 단독주택은 아예 법적인 근거가 전무한 실정이다. 세입자114의 김태근 변호사는 “단독주택은 민법상 ‘긴급 사무관리 조항’에 근거해 세입자들이 건물 관리에 나설 수 있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됐을 때 책임 추궁을 받게 될 우려가 있어 그나마도 쉽지 않다”며 “이와 관련해 전세사기특별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에는 관할 지자체장이 실태 조사를 거쳐 정상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전세사기 피해주택에 대해 위탁 관리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 5월에 발표한 정부안에는 피해주택 관리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무했다. 이철빈 공동위원장은 “정부에서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매입하면 LH 기준에 맞춰 관리하면 되겠다고 보는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구분등기가 되어 있는 주택은 건물의 한 호실만 매입하게 될 텐데 공용시설 문제가 같이 엮인 경우에는 LH도 속수무책이다. 다가구주택의 경우가 좀 낫지만 이 경우는 권리관계가 복잡해 매입 자체도 까다롭다”고 말했다.
신상헌 공동위원장 또한 “정부안에 따라 LH가 주택을 낙찰받아도 건물 전체를 소유하게 되지 않는다면 안전 관리 문제를 놓고 다른 소유주들과도 또 협상을 해야 한다”며 “정부기관이 됐든 지자체가 됐든 이런 특수한 공백 기간에 주택 관리 책임을 도맡을 기관이 정해져 있어야 한다. 개정안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정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어 보완 입법을 추진할 예정이다. 향후 개정안에는 전세사기 피해주택이라면 공동주택뿐만 아니라 다가구 같은 단독주택 유형도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근거 조항을 넣어주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산=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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