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거부권 무력화할 ‘차선책’ 만지작…국민의힘 헌법소원 제기 방침이지만 대상 여부 논란
정부는 7월 9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정기 국무회의를 열고 ‘순직해병 수사방해 및 사건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건의안을 심의해 의결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 순방 도중 전자서명 방식으로 거부권을 결재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대통령 취임 이후 15번으로 늘어났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30여 년간 행사된 거부권 9건(노무현 전 대통령 6개·이명박 전 대통령 1개·박근혜 전 대통령 2개)보다 많은 횟수다. 특히 채 해병 특검법의 경우 지난 21대 국회에서 통과시킨 특검법안에 이어 두 번째 거부권 행사다.
대통령실은 “경찰 수사 결과로 실체적 진실과 책임소재가 밝혀진 상황에서 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순직해병 특검법은 이제 철회돼야 한다”고 거부권 행사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해병의 안타까운 순직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악용하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8일 경북경찰청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와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등을 무혐의로 불송치 결정했다.
윤 대통령이 다시 채 해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야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대행 겸 원내대표는 7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해병대원 특검법을 두 번이나 거부했고, 국민의힘은 대통령 부부의 방탄을 위해 국회 파행을 서슴지 않았다”며 “국민의 안타까운 죽음을 덮는 데 혈안이 된 비정한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과연 진짜 보수라고 할 수 있을지, 과연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국회로 돌아오는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 시점을 두고 고심하는 모습이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한 법안이 재의결되려면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의원 108명 중 8표 이상이 이탈하면 재의결 요건을 채울 수 있다.
민주당은 재의결을 국민의힘 전당대회 결과가 나오는 23일 이후 추진할 방침이다. 이해식 수석대변인은 15일 “국민의힘 전대가 끝나야 본회의 소집 등 의사일정 협치가 원활히 이뤄질 거고, 특검법 처리 방안 관련 가닥이 그때쯤 잡힐 거라 우선 전대 이후로 시점을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국민의힘 전대가 유력한 당권주자인 한동훈 후보와 친윤계 사이 극한 갈등에 ‘자폭 전대’라고까지 불리는 만큼, 새 지도부 선출 결과에 따라 이탈표가 나올지 여당의 기류를 살펴 진행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 후보는 본인이 당대표가 되면 ‘대법원장 등 제3자 추천 특검’ 등 조건으로 특검법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에 야권에서는 한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여야 합의를 통해 한 후보의 의견을 절충·반영한 수정안을 만들어 재표결에 통과시키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야당이 채 해병 특검법 재표결 시점을 숙고하는 이유는 정부여당과의 대립을 넘어 성과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 때문이다. 야권 한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 들어 ‘입법 통과-거부권 행사-재의결 폐기’ 수순이 반복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무분별한 거부권 사용이 문제지만,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다보니 국민들에 피로감이 쌓인 것도 사실”이라며 “야당이 거부권을 무력화해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플랜B’를 준비하고 있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채 해병 특검법 국회 재의결이 부결될 경우 대안으로 상설특검법을 활용해 채 해병 특검을 띄우는 방안이 골자다.
상설특검법은 특검 출범을 제도화한 법으로, 지난 2014년 제정됐다. 개별 사안에 대해 특검법을 만들 필요 없이, 국회 본회의 의결 또는 법무부 장관의 도입 필요성 판단만으로 곧장 특검 가동이 가능하다. 앞서 2020년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으로 상설특검이 한 차례 이뤄진 바 있다. 특히 상설특검은 이미 만들어진 상설특검법에 따라 꾸려지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다만 상설특검은 현재 민주당이 내놓은 특검법안에 비해 수사 인력이 적고, 활동 기간이 짧다. 민주당의 특검법안은 파견 검사와 공무원이 각각 20명과 40명 이내고, 수사 기간은 최대 100일(준비 기간 제외)이다. 반면 상설특검은 파견 검사 및 공무원이 각각 최대 5명과 30명이고, 수사기간도 최대 90일까지다.
또한 특검 후보 추천에도 걸림돌이 있다. 현행법에는 국회규칙에 따라 ‘특검 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는데, 추천 위원 7명 중 3명은 법무부 차관·법원행정처 차장·대한변협 회장이 맡고, 나머지 4명은 국회 제1·2 교섭단체가 2명씩 추천하도록 돼있다. 제2교섭단체인 국민의힘이 정부부처인 법무부와 함께 특검 후보 추천에 지연·저지 작전을 펼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민주당은 정부여당의 전략에 대비해 국회규칙 개정을 통해 국회 추천위원 4명을 야당 몫으로 돌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규칙은 국회 관련 법의 일종의 시행세칙으로, 본회의 의결로 제·개정할 수 있다. 특히 소관 상임위인 운영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을 모두 민주당이 맡고 있어, 본회의 의결까지 야당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이러한 개정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15일 “이런 식의 국회규칙 개정이 허용되면 중립적 특검을 임명하도록 한 법률이 필요 없고 모든 것을 절대다수 의석을 지닌 민주당 마음대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라며 “과거 독일을 패망의 길로 몰고 간 나치식 일당독재와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국회규칙을 개정하면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방침이다. 헌법소원의 근거는 모법인 상설특검법의 ‘추천위원회 위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독립하여 직무를 수행한다’는 조항과 민주당이 개정하려는 국회규칙이 상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번 사안이 헌법소원 제기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민주당 소속 법률가는 “헌법소원은 개인의 기본권이 침해됐을 때 제기하는 것이다. 자기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이나 수사 대상자들이 직접 제기해야 한다”며 “또한 직접성이 인정돼야 한다. 개정 국회규칙 자체가 기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통해 특검이 출범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며 설명했다.
앞서 헌법재판소가 비슷한 헌법소원 사례에 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최서원 씨(개명 전 최순실)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법’에서 특검 후보자를 모두 야당에서 추천하도록 규정한 내용이 위헌이라고 헌법소원을 냈지만, 헌재는 2019년 2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헌법소원이 아닌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해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법사위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염두에 둔 국회규칙 개정도 모든 사안에서 야당이 추천위원을 다 가져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대통령과 관련된 경우 대통령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야당 추천위원으로만 구성하겠다는 거다”라며 “이는 과거에도 사례가 많다. 권한쟁의 심판으로 가도 이기기 힘들 거라 본다”고 전망했다.
박주민 의원은 7월 16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헌법소원이나)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다고 해서 윤 대통령이 법률적으로 의무를 피할 수 없다”며 “(상설특검법상) 대통령이 (특검 후보를 추천받은 뒤) 3일 내 임명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권한쟁의 심판 때문에 특검을 임명하지 않으면 법률 위반이 돼 탄핵 사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정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채 해병 특검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해식 대변인은 상설특검 활용 방안에 대해 “특검법 재의결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지금 검토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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