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사건팀, CCTV 속 사진으로 전단 재배포해 제보받아…용의자 “잠에서 깬 점주 저항해 찔렀다” 진술
2008년 12월 9일 새벽 4시쯤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의 한 슈퍼마켓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 시간 복면을 쓴 남성이 슈퍼마켓을 찾아 점주 B 씨에게 금품을 요구했지만 B 씨의 저항으로 몸싸움이 벌어졌다. 범인은 소지하고 있던 흉기를 휘둘렀고 B 씨가 쓰러지자 금품을 갈취해 도주했다. 인근 병원으로 후송된 B 씨가 숨을 거두면서 강도 살인 사건이 됐다.
수사는 비교적 쉽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됐다. 슈퍼마켓에 CCTV가 있었던 터라 경찰은 CCTV에 찍힌 검정 트레이닝복 차림에 복면을 쓴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을 용의자로 특정했다. 사건 이틀 전에도 용의자가 슈퍼마켓을 방문해 담배를 구입한 사실을 확인했다. 사건 당시에는 복면을 썼지만 이틀 전 방문 영상에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전단을 통해 범인 얼굴을 공개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엔 비교적 흔한 강도 사건이었다. B 씨가 사망하면서 강도 살인 사건이 됐지만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을 만큼 쉽게 해결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경찰은 범인 검거는 물론이고 용의자 신원 파악에도 실패하면서 이 사건은 장기미제사건이 되고 말았다.
16년이 지난 2024년 7월에야 사건 이름이 ‘시흥 슈퍼마켓 살인사건’으로 명명되며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용의자 A 씨가 체포됐기 때문이다. 지난 16년 동안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던 조용한 장기미제사건이지만, 범인 검거를 포기하지 않고 수사를 거듭한 경찰이 일궈낸 성과다.
시흥경찰서 강력미제사건 전담팀이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재수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2017년이다. 여전히 별다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증거인 현장 CCTV 영상이 존재하지만 16년 전 얼굴만으로 신원을 특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증거가 하나뿐이니 경찰 재수사도 당시 CCTV 영상 속 사진을 담은 수배 전단을 재배포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범인 얼굴을 강조해서 수배 전단을 제작했다.
2024년 2월 결정적인 제보가 경찰에 들어온다. 2017년 재수사 과정에서 배포한 수배 전단을 보고 누군가 전화로 제보를 해온 것이다. 그렇게 시흥경찰서 강력미제사건 전담팀은 A 씨의 신원을 특정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한 경찰은 당시 범행 현장 CCTV 속 용의자 얼굴과 A 씨의 연도별 사진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CCTV 속 범인과 A 씨의 2006년도 운전면허증 사진을 비교분석해 동일인일 가능성이 92%라는 감정 결과를 얻는다.
이어 경찰은 A 씨 통화 내역과 금융계좌 내역 등을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통해 범행 발생 시기인 2008년 12월 즈음 A 씨가 화성과 광명 지역에서 생활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법원으로부터 A 씨의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7월 14일 오후 7시 53분 경남 소재의 거주지 앞 차량 안에서 A 씨를 검거했다. 검거 당시 A 씨는 범행을 부인했다고 전해진다.
경기도 시흥경찰서에서 세 차례 조사가 진행됐지만 거듭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혐의 내용을 부인하던 A 씨는 결국 17일 새벽 범행 일체를 자백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미안하다”고 진술했다. 이날 A 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2008년 12월 7일 새벽 담배를 사기 위해 해당 슈퍼마켓을 찾았는데 B 씨가 큰 소리로 불러도 일어나지 못할 만큼 깊은 잠이 들어 있었고 금고에 만 원권이 여러 장 있는 모습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이틀 뒤 9일 새벽 4시 무렵, B 씨가 깊이 잠들었을 시간대에 다시 슈퍼마켓을 찾은 A 씨는 B 씨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금고를 열어 돈을 꺼내려 했다. 그때 B 씨가 잠에서 깼고 A 씨는 “돈만 가져갈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B 씨가 저항하면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A 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B 씨를 마구 찔러 사망에 이르게 했다.
범행 직후 A 씨는 우선 주거지로 돌아가 피가 묻어 있는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차량으로 경남 마산의 본가로 도주했다. 도주 과정에서 범행도구인 흉기는 고속도로에, 피가 묻은 옷은 진주시의 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훔친 돈은 만 원권 몇 장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도 돈에 피가 묻어 있어 A 씨는 도주 중 차창 밖으로 훔친 돈을 버렸다고 진술했다.
A 씨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우발적인 살인이었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단지 돈을 훔치려고 B 씨가 잠든 시간에 범행을 저질렀는데 잠에서 깬 B 씨가 저항해 우발적으로 살인에 이른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경찰은 A 씨가 승용차 트렁크에 있던 흉기를 소지하고 해당 슈퍼마켓으로 간 것과 마스크와 장갑 등도 준비한 상태였다는 점 등을 토대로 계획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전동선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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