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 정의선호 “100층은 없다” 천명…“부지 사놓고 말 바꾸나” 비판도
서울시의 강공에 현대차그룹이 ‘백기’를 들었다는 일부 언론의 풀이에 대해선 양측 모두 극도의 불편함을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선 현대차그룹의 최근 행보에서 노련한 ‘리드’가 엿보인다는 해석도 나온다. 현대차 측이 GBC 층수를 ‘반토막’ 내는 초강수를 던져 서울시와 ‘밀당’을 유도해냈다는 풀이다. ‘실용주의 경영’ 스타일의 정의선 회장 체제가 부친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국내 최고층 신사옥’ 꿈을 자연스레 폐기 처리해가는 수순이라는 해석과 결을 같이 한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매입한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7만여㎡)에 계획한 신사옥 105층(569m) 건물 1개 동을 55층 2개 동으로 바꿔 짓는 내용의 설계변경안을 지난 2월 서울시에 냈다. 서울시는 이 같은 설계 변경을 위해서는 용적률·공공기여율 등을 정한 2016년 사전협상 결과에 대해 ‘재협상’이 필요하다며 제동을 걸었다. 당시 서울시는 현대차와 사전협상에서 사업지 용도 종상향(3종일반주거지역→일반상업지), 용적률 상향(800%까지) 등의 특혜를 주는 대신 현대차에서 1조 7491억 원 규모의 공공기여금을 받기로 협의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5일 설계변경안을 다시 철회하고, 공공성과 디자인 등을 보강한 새 제안서를 제출하겠다는 뜻을 서울시에 전했다. 이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직접 재협상 필요성을 밝힌 지 4일 뒤다. 오 시장은 지난 1일 취임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건설 계획은 기존과 완전히 다르다”며 “새로운 계획을 세웠으면 걸맞은 공공기여를 새롭게 논의하는 게 상식이고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설계변경안을 꺼냈다 접게 돼 모양이 다소 상한 듯하지만 실리적으론 100층 이상 초고층 신사옥을 짓지 않겠다는 그룹의 의지를 천명하는 소득을 얻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으로 2014년 10조 5500억 원에 해당 부지를 매입하며 시작된 GBC 건설계획은 2020년 정의선 회장 취임 이후 기류가 바뀌었다. 2021년부터 105층 건물을 70층 2개 동이나 50층 3개 동으로 짓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의선 회장은 코로나19로 그룹 경영에 여러 불안 요인이 더해진 데다 건설물가 급등에 따른 공사비 증가, 2017년 롯데월드타워(123층·555m) 준공으로 ‘국내 최고층’ 상징성이 약화된 변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더 ‘실리’에 맞는 설계안을 찾은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지난 2월 설계변경안을 내면서 “대내외 경영환경 변화와 현대차그룹의 미래전략 등을 반영해 실용성, 효율성, 지속가능성이 보장된 새로운 공간계획 필요에 따른 변경이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건설업계에서는 해를 거듭하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공사비가 그룹에 큰 부담이 됐을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2016년 2조 원대에서 출발한 GBC 공사비 추정치는 2018년 3조 7000억 원으로 뛰더니 현재 5조 원대에 이르렀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105층 건설계획을 55층안으로 바꿀 경우 어림잡아 공사비를 30~50% 절감할 수 있다.
100층 이상 건설 시 현대차그룹이 국방부에 지원하기로 한 수천억 원 규모의 새 군사레이더 구매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소득도 있다. 과거 국방부는 GBC를 260m 높이 이상으로 지을 경우 군 레이더 가시권을 방해할 수 있다는 등 우려를 제기했고, 현대차그룹 측이 레이더 교체 비용을 지불하기로 협의한 바 있다.
그룹의 사업전략 차원에서는 신사옥을 차세대 모빌리티 주력 사업의 전초기지로 적극 활용되도록 설계하고 싶은 ‘니즈’도 있다. UAM(도심항공교통) 이착륙장을 조성하거나 로보틱스, 자율주행 등 각종 미래 기술이 융합된 업무시설을 지으려는 구상이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판단은 적지 않은 전문가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학회장을 역임한 이상명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일요신문i’에 “자동차 산업이 많은 격변을 겪고 있어 기술적·생산적 투자가 굉장히 많이 필요한 상황에서 투자 비용을 (초고층사옥 건설에) 분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제3자 입장에서 볼 때 현 정의선 회장 체제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서울시 입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기업이 처한 내외 환경은 계속 바뀔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선택하는 부분에 대해 일방적으로 과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몽구 명예회장 시절 GBC 105층 설계를 총괄지휘한 김종성 건축가는 지난 6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현대차로서는 연구개발에 써야 할 돈이 많은데 이를 부동산(GBC)에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성립이 안 된다”며 현 정의선 회장 기조에 손을 들어줬다.
해당 지역이 지닌 기능적 특수성과 상징성을 강조하며 부지 소유주가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초고층도시건축학회장을 지낸 강부성 서울과학기술대 건축학부 교수는 통화에서 “GBC 일대는 대한민국의 대표 랜드마크 지역으로, 현대차그룹이 105층 신사옥을 짓겠다고 해 해당 부지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 와서 그 계획을 버리고 55층 건물을 짓겠다고 하면 이는 ‘대국민 사기’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70~80층 정도까지는 국민적 수용이 가능하겠지만 단순히 55층 사옥을 지어 자사 사무실로 쓰겠다는 구상이면 해당 공간을 잘 개발할 수 있는 다른 기업에 땅을 넘기는 게 맞다”며 “공사비 부담이 정말 문제라면 다른 기업들을 더 끌어들여 공동 개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차그룹은 추가 논란을 우려하며 내부적인 검토 내용에 대해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그룹 관계자는 “일단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00층 이상)초고층 건설안은 새 계획안에 포함이 안 될 것”이라며 “55층으로 다시 갈지, 60층으로 할지 아직 정해진 것이 없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제안서를 보완해 서울시에 제출하고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 등을 향해 일부 언론이 제기한 ‘초고층 집착론’을 강하게 부정하며 진화에 나섰다. 주무부서인 서울시 동남권사업과 관계자는 통화에서 “서울시가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105층 건설 약속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차 측이 설계를 변경한다고 하니 그에 따라 공공기여분 등 과거 협상 내용에 대해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뿐”이라며 “오래 끌고 갈 이유도 없어 가능하면 빨리 재협상하는 것을 서울시는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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