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테리 사건 이어 정보사 블랙요원 신상유출 비상…정보의 정치화로 ‘공작 생태계’ 붕괴 위기
7월 16일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을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수미 테리는 1972년 서울에서 출생한 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가정보위원회(NIC) 등을 거친 한반도 전문가다. 동아시아통으로도 꼽힌다.
수미 테리 공소장엔 2013년부터 2023년 6월까지 국정원 간부 요청에 따라 전·현직 미 정부 당국자와 만남을 주선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수미 테리가 한국 정부 대리인 역할을 했고, 그 대가로 명품 핸드백과 연구활동비 등을 수령했다는 혐의다. 10년여 동안 수집된 증거 자료가 2024년 7월 세상에 공개됐다. 국정원 요원들이 명품 매장, 고급 레스토랑 등에서 수미 테리와 함께 있는 장면이 버젓이 현지 CCTV에 담겼다. 어설픈 공작의 꼬리가 제대로 잡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이런 공작 행위가 동맹국에서 발각될 경우, 음지에서 서로 합의 아래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사건의 특이한 부분은 미국이 10년 동안 축적해 온 증거자료를 한 번에 공개하며 사건을 공론화했다는 점”이라며 “미국 쪽에서 현 시점에 이 사건이 공개돼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해프닝인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7월 29일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현안 보고에서 수미 테리 사태와 관련해 “한미동맹 훼손은 일절 없다”고 강조했다. 국회 정보위 여야 간사 브리핑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 건(수미 테리 기소 사건)을 양국 안보 협력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 문제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국정원과 함께 대북 및 해외 공작 주축으로 활동하는 국군 정보사령부에서도 메가톤급 이슈가 터졌다. 군무원 A 씨가 해외 블랙요원 신상이 담긴 파일을 중국인(조선족)에게 유출한 정황이 포착됐다. A 씨는 해킹에 따른 유출이라는 입장이지만, 정보사 측은 해킹에 의한 유출이 확실히 아니라는 입장이다.
블랙요원은 ‘음지 중 음지’에서 활동하는 공작원이다. 대북 및 해외 공작 휴민트 파이프라인 조성 및 관리를 책임지는 핵심 실무자이자, 정보사 내부에서도 정보 접근이 지극히 제한적인 ‘공작의 보루’다. 그런 예민한 정보가 유출됐다는 소식은 세간에 상당한 충격을 일으켰다.
사건 후 해외 파견 중인 블랙요원들이 급거 귀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내부에 만들어진 휴민트 시스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온다. 해외 첩보망이 붕괴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우려다. 여기다 블랙요원 신상 유출로 해외 공작 경험이 없는 요원들이 현장에 투입될 수요가 발생한 점은 정보 당국 입장에서 상당히 뼈아픈 대목이기도 하다.
전직 군 정보기관 관계자는 “수사가 완료되고 기소가 된 다음 공개할 사안과 비공개할 사안을 가려낸 뒤 공개했어도 늦지 않았을 사안이다. 블랙요원 신상이 유출됐다는 정보가 통째로 공개되는 부분 자체가 국가 안보에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이런 사건이 지속해서 발생하고, 세상에 공개되면 현장 일선에 있는 요원들이 상당한 부담을 안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요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제대로 된 임무수행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블랙요원 활동 이력이 있는 한 인사는 “블랙요원에게 신상정보는 목숨 줄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건이 터진 것이 조직 내부의 기강 해이인지, 아니면 방첩 인프라가 무너져서 발생한 일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결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며 “타지에서 신분을 감추며 임무수행을 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조국에 충성하는 것인데, 조국에서 그 충성을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배신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7월 30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전체회의에선 정보사와 국군 방첩사령부, 사이버작전사령부 등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정보위 여당 간사 이성권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정보사는 사건을 인지한 뒤 해당 군무원을 직무배제했고, 해외파견 인원 즉각 복귀, 요원 출장 금지, 시스템 정밀점검 등 조치를 취했다.
야당 간사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정보사는 “이번 사건이 어떤 규모에서든지 상당한 타격을 주겠지만, 타격을 받지 않도록 매우 속도감 있게 조치를 취했으며 상당 부분 회복했다”고 보고했다.
복수 전직 요원들은 이런 사태들이 ‘정보의 정치화’에서 기인했다고 입을 모았다. 전직 정보 당국자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이 시작된 뒤 국군 기무사령부를 둘러싼 이슈가 불거지며 ‘방첩 기능’이 마비됐다”면서 “정치적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 별개로 방첩 기능이 약화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내부 정치가 성행하며 공작 경험이 풍부한 요원들이 축출됐다. 2010년대 후반을 국정원 전문성이 상당부분 희석된 시기로 보고 있다. 해외파트 전력이 상당히 약해지면서 그동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어설픈 일처리 사례들이 회자되기도 했다”며 “국정원이 전·현직 정보사 베테랑 요원들을 집중 수사하기도 했던 것으로 안다. 베테랑들이 타깃이 되자, 현직 실무자들이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정보기관이 정보수집 및 공작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제공돼야 하는데, 내부적이든 외부적이든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본질이 흐려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국정원의 정보탐지, 정보사의 현장실무, 기무사(국군 방첩사령부)의 방첩 자정작용이 삼위일체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 기능들이 차례로 약화한 나비효과가 이제야 하나둘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전·현직 현장 실무자들의 바람과 달리 이번 사건 이후에도 정보기관을 둘러싼 정치 공방은 끊이질 않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7월 3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 간첩법은 적국인 북한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인 등 외국인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한다”면서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 개정이 제21대 국회에서 민주당 제동으로 무산됐다”고 했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7월 31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간첩법 민주당 책임론을 들고 나온 한 대표는 역시 전형적인 소탐대실형 헛똑똑이”라면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 시절 법원행정처가 강력하게 (간첩법 개정을) 반대해서 여야 의원들이 공히 법 보완을 주문했던 정황이 속기록에 나와 있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대표를 향해 “책임이 있다면 본인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선 수미 테리 사태와 정보사 요원 신상유출 사건을 둘러싼 여야 간 책임공방이 이어질 전망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각 사건의 타임라인이 정리되고 나면, 어느 정부에서 벌어진 일인지를 두고 여야가 열띤 공방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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