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는 잘못 보거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르게 보는 것이다. 눈속임이다. 그런데 이게 유쾌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거나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경우가 많다.
서양미술은 이런 눈속임 안에서 자라온 예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큰 눈속임이 원근법이다. 평면의 그림을 공간이 있는 3차원으로 보게끔 착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후기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가 보여준 눈속임의 미학은 오늘날 작가들에게도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만큼 시간을 뛰어넘는 힘을 지닌다. 아르침볼도의 기발한 이미지 창출 방식은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상업 광고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아직까지도 막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사물을 조합하는 콜라주 기법의 회화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단순한 눈속임에서 끝나지 않고 분명한 내용을 보여준다. 즉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소품으로 동원되는 사물들은 고유의 성격을 그대로 갖지만, 이들이 결합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로 바뀐다는 것이다.
아르침볼도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시대를 풍자하는 위력을 인정받아 고국은 물론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했고, 황제의 측근으로 컬렉션을 관장하며 궁전 건축, 무대 디자인에도 관여했다. 이처럼 생전에는 큰 성공을 누렸지만, 세상을 떠난 후 잊혔다. 작품의 감상 가치보다는 아이디어에 충실한 그림이었기 때문일 게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이 시기부터 일어난 새로운 미학의 구미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리라.
정미진 작가의 작품에서 아르침볼도의 상상력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미지를 창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시 괴물’이라는 주제로 연작을 보여준다. 클로즈업된 몬스터 이미지가 시각적 충격을 준다. 로봇 같기도 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의 얼굴로도 보인다.
대부분 얼굴 이미지인데 꼼꼼히 뜯어보면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사물들이 콜라주 형식으로 결합됐다. 건물, 가로등, 자동차, 기차, 육교, 표지판, 신호등, 간판 같은 것들이다.
정미진 작가는 외국 생활과 병원의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던 독특한 경험이, 이미지를 조합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보여주는 몬스터 이미지는 우리가 생활하는 도시가 괴물처럼 낯설고 거칠지만 새로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도 담고 있다. 그래서 정미진의 회화는 보는 재미와 의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준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