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0일 동교동 사저를 방문한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대화를 나누던 김대중 전 대통령.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그는 서서히 ‘퇴임 후 활동’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 ||
5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지난 2월24일 동교동 사저로 돌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직 완전한 자연인으로 복귀하지 못한 상태다. 퇴임 직후 한나라당이 발의한 대북송금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재임중 통치행위’가 사법적 심판의 도마에 오름으로써 ‘자연인 김대중’은 그만큼 요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석달을 끌어온 대북송금 특검은 박지원 비서실장, 이기호 경제수석, 이근영 산은 총재 등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 중책을 맡았던 인사들의 줄구속으로 이어졌고, 특검 막바지 수사의 칼날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모아졌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기간 연장을 거부함으로써 일단락됐다.
퇴임 이후 채 다섯 달도 안돼,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불명예 상황에까지 직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퇴임기를 들어봤다.
“전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자연인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일상에 전념할 수 있는 때가 언제쯤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퇴임 이후 마지막 비서관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김한정 비서관은 지난 5일 기자와 대면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건강과 (특검 등) 국내 사정에 발이 묶여 당분간 보류해 놓은 상태입니다. 이제 차츰 강연 요청에 응하실 예정인데, 조금 더 두고 봐야겠죠.”
퇴임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동안 건강이 좋지 못했다. 퇴임 넉 달여 동안 병원에 입원한 것만도 세 차례에 달한다.
80대 고령의 나이에 대통령이라는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나 일종의 ‘퇴임 후유증’이 겹쳤던 것. 최근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신장투석’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고.
“퇴임 직후에 비해, 지금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어요. 식사도 잘하시는 편이고요. 의료진이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다며 고기를 많이 드시라고 권해서 고기를 종종 드시는 편입니다.”
병원 치료를 제외하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꼭 두 차례 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4월5일. 장남 김홍일 의원의 차녀 결혼식에 참석했고, 같은 달 22일 노무현 대통령 초청 부부동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한 김 전 대통령은 최근 들어 재임 기간 종종 즐겼던 강변도로 드라이브를 재개했다고 한다. 주로 ‘투석’을 위해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올림픽도로를 따라 팔당대교까지 다녀오거나, 강변북로를 따라 자유로를 달려 통일동산이나 임진각을 방문하곤 한다고.
그러나 일주일에 두 차례 병원에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저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재임 때에는 1분 단위로 짜여지는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일주일에 서너 권 이상의 신간을 독파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보좌진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나가 신간 서적을 구입하는 것으로 주말 일정을 시작했을 정도.
▲ 동교동 DJ 사저 내부. | ||
퇴임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중국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있다고 한다. 김한정 비서관은 “최근에는 중국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고 계신다”며 “국내 서적은 물론이고, 외국 번역서도 두루 탐독하고 있다”고 전했다.
독서 외에 김 전 대통령은 하루에 한두 명씩 찾아오는 내방객을 맞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내 인사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치권 인사를 제외하고,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등 각계 지도급 인사들의 방문을 받고 있다고.
또한, 외국에서도 내방객들이 종종 찾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일본 외무상을 지낸 고노 요헤이 전 외상이 방문했다고. 이밖에도 미국과 유럽 등 재임중 인연을 맺은 인사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국문제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국내 정치인 가운데에는 지난 2일 진승현씨로부터 5천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방문한 권노갑 전 고문 정도가 유일하다. 지난 6월에는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정대철 민주당 대표를 차례로 만난 바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아끼고 있다. 다만 지난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 3주년을 맞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중 심혈을 기울였던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자신의 노력이 ‘특검’ 등으로 훼절되고 있는데 대해 매우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최고책임자였던 자신은 무사하고, 자신을 보좌했던 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된 데에 대해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
김한정 비서관은 “(남북관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봐야 한다”며 “지금 당장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급급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KBS가 방송한 <미리 가 본 경의선> 프로그램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한다. 6·15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바탕으로 3년여 만인 올 9월 경의선 개통을 앞두고, 경의선이 지나갈 북한의 주요도시를 둘러본 <미리 가본 경의선>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재임동안 이룩한 남북화해무드가 다시 한 번 조성되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직 국내 현실은 <미리 가 본 경의선>과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은 최근 국제관련 업무와 영어 통역을 담당할 별정직 2급 비서관 공채에 나섰다. 퇴임 이후 활동을 재개할 무대가 ‘국내 정치무대’가 아닌 ‘국제무대’임을 우회적으로 암시했다. 조만간 김 전 대통령은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교사절들을 연쇄 접촉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활동의 재개를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내 정치상황과 무관하게, 말 그대로 진정한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뜻을 국제무대에서 펼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