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앤 캐리 거래 청산과 미국 경제 침체 우려…‘금리 인하보다 연착륙 중요’ 미·일 공조 주목
기준금리 인하 자체보다는 경기를 서서히 안정시키는 연착륙(Soft Landing)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사상 초유의 초장기 저금리로 미국과 역대급 금리 차를 유지하며 글로벌 금융시장에 투자에너지를 공급해 온 일본 중앙은행과의 공조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미·일 중앙은행의 절묘한 경기 조절과 적절한 통화정책 공조가 이뤄지지 못한다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현될 위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8월 초 글로벌 증시 대폭락 사태의 원인은 ①일본 중앙은행의 전격적인 금리 인상 ②예상을 웃돈 미국의 실업률 통계 ③워런 버핏의 주식비중 축소가 이어진 결과다. 세 가지 이벤트가 모두 반영된 결과가 엔 캐리 거래의 청산(Unwind)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7월 31일 단기 정책금리 상단을 0.1%에서 0.25%로 올리며 “정책금리 변경 후에도 실질금리는 큰 폭의 마이너스”라며 “경제와 물가 전망치가 실현된다면 계속 정책금리를 올려 금융완화 수준을 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 당 154엔으로 거래를 시작한 엔화 환율은 이날 장중 149엔까지 떨어졌고, 미국의 9월 금리 인하 계획과 부진한 실업률 통계가 발표된 후인 지난 8월 5일에는 141엔까지 위협받았다.
엔 캐리 거래(Yen carry trade)는 제로(0) 금리인 일본에서 엔화를 빌려 달러로 바꾼 후 전세계 주요 자산에 투자하는 방법이다. 차입으로 투자규모를 늘려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2022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금리가 인상되는 가운데 일본의 금리만 오르지 않으면서 무위험 수익도 가능했다. 100만 달러를 담보로 100만 달러어치 엔화를 거의 무이자로 빌려 금리가 5%가 넘는 미국 단기 국채에 투자하면 10만 달러의 이자수익을 낼 수 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되갚아야 할 돈이 줄어 환차익까지 가능하다. 1달러가 130엔일 때 100만 달러(1만 3000만 엔)를 빌렸다면 1달러가 150엔이 됐다면 1만 3000만 엔을 갚을 떼 86만 666달러만 환전하면 된다. 13% 이상의 환차익이 발생한다. 일본 금리가 높아지는 것보다 환율이 움직이는 것이 엔 캐리 거래에 더 치명적이다.
엔 캐리 거래의 또 다른 문제는 헤지펀드나 초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패밀리오피스(FO) 등 투자 전략을 알기 어려운 이들이 많이 활용하고, 그 규모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엔 캐리 거래가 주로 이뤄지는 일본은행들의 외화대출 규모는 올해 3월 말 1조 달러에 달했다. 2021년 대비 21%나 늘었다. 엔 캐리 거래는 일본 금융회사를 통해서도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국제투자 규모는 3월 말 기준 3조 4000억 달러로 역시 2021년보다 17% 증가했다.
엔 캐리 거래의 특징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불리는 1998년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사태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금리가 더 높은 루블 채권에 투자하던 LTCM은 러시아 정부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파산위기에 몰린다. LTCM에 돈을 빌려준 미국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피해를 입으면서 위기가 확산된 사건이다.
리먼브라더스는 비우량주택담보채권(Subprime mortgage)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집값 폭락으로 대출 회수에 실패하면서 무너졌다. 당시 미국의 다른 금융회사들도 리먼브라더스와 비슷한 투자가 많았다.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지면서 거래를 하던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타격을 입으면서 금융시스템이 붕괴된 것이 글로벌 금융위기다.
일본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이에 따라 엔화가 강세로 돌아선다면 엔 캐리 자금은 심각한 손실 위기에 처하게 된다. 차입으로 투자금을 불린 만큼 손실이 나면 그 부담도 차입 배수만큼 커진다. 이 때문에 엔 캐리 거래를 활용한 투자자들은 엔화 가치의 변화에 민감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손실 회피를 위해 단기간에 투자자산을 처분한다면 단기간에 가격이 폭락할 수 있다.
지난 5일 일본 증시 낙폭이 가장 컸는데 달러를 엔화로 바꿔 일본에 투자한 이들이 손절에 나섰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2023년부터 올 7월까지 일본 니케이225 지수는 60% 넘게 올랐다. 이 기간 70% 넘게 오른 나스닥에 버금간다. 그동안 쌓인 차익이 큰 만큼 일본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으로 엔화가 강세를 보이자 이익 감소를 감수하고 주식을 파는 ‘익절’을 단행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 증시에서도 엔 캐리 거래 자금이 상당하다는 게 정설이다. 우선 일본 투자자의 주식 보유액이 상당하다. 2022년 말 12조 4000억 원에서 2023년 15조 원을 넘었고 올해는 16조 원까지 돌파했다. 엔화 대비 원화가치는 지난 6월 말 100엔에 855원까지 하락했다. 일본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이후 원·엔 환율은 급등해 지난 8월 5일에는 960원까지 높아졌다.
이해를 위해 달러 환전 과정은 생략해보자. 엔 캐리 투자자 입장에서 6월 말에는 100엔을 회수하려면 855원만 바꾸면 됐는데 지난 5일에는 960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12% 이상의 환 손실이다. 일본 외에 다른 국적의 외국인 투자자금 가운데도 엔 캐리를 활용한 비중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5일 코스피 낙폭이 니케이225 다음으로 컸던 배경으로 엔 캐리 거래 청산을 의심하는 이유다. 미국 경기에 대한 우려로 코스피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5일 낙폭을 대부분 회복한 다른 나라 증시와 달리 8일에도 코스피는 지난 주말 종가 대비 4%가량 낮은 수준이다.
지난 8월 5일 글로벌 증시 폭락 이후 미국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다급히 대책을 내놓은 곳은 미국이 아닌 일본 중앙은행이다. 우치다 신이치 일본은행 부총재는 7일 오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린 강연에서 “금융 자본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금리 인상을 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이후 일본 증시는 빠르게 반등하며 5일 폭락 직전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회복했다. 하지만 엔 캐리 거래 청산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본이 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양국 금리 차가 줄어든다. 그만큼 엔 캐리 거래 매력도 약해진다. 차입으로 투자금을 불린 엔 캐리 거래의 특성을 감안하면 투자 회수를 고민할 만하다. 엔 캐리 자금은 미국 기술주에도 상당부분 투자됐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미국 증시가 일부 빅테크를 중심으로 상승세를 이어오면서 엔 캐리 투자도 상당한 수익을 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증시가 하락 반전 한다면 추가적인 이익 훼손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차익 실현에 나설 만하다. 일본의 통화정책과 함께 미국의 경기 상황도 엔 캐리 자금의 변화를 촉발할 주요 변수인 셈이다.
최근 미국 경제지표를 보면 실업률은 높아지지만 서비스업 경기는 여전히 견조한 흐름이다. 계속된 물가 상승으로 미국 가계의 소비여력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미국의 유통업체들도 일상 제품의 할인 판매에 나설 정도다. 소비가 위축되면 기업실적이 악화되고 그 만큼 주식의 가격부담이 커진다. 인공지능(AI)은 최근 미국 증시 상승의 주요한 원동력인데 그 바탕에는 빅테크의 적극적 투자가 있었다.
빅테크는 대부분 경기에 민감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비가 위축돼 실적이 부진해지면 아직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하는 AI 관련 투자 부담이 커진다. 빅테크가 AI 투자를 줄이면 관련기업들의 실적에 부정적이다. 워런 버핏이 애플을 비롯한 미국 주식 비중을 크게 줄인 배경으로도 소비 위축이 꼽힌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 미국 경제에 대한 진단은 엇갈린다. 아직은 그래도 괜찮다는 낙관론과 함께 당장은 괜찮아 보여도 이미 경기흐름이 꺾이기 시작한 만큼 앞으로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비관론이 공존한다. 낙관론이 맞다면 미국 증시는 급락을 피하면서 연준의 금리 인하에 따른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하는 경로를 밟을 수 있다.
비관론이 적중한다면 미국 증시가 급락하며 엔 캐리 거래 자금의 청산을 자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나 홀로 호황을 이어가던 미국 경제가 침체되면 미국의 소비에 기대던 한국, 일본, 독일 등 제조업 강국이나 신흥국 경제도 타격을 입게 된다. 이는 다시 이들 국가의 엔 캐리 자금 이탈을 자극할 수 있다. 경기침체 확산에 따른 투매(Panic sell) 확대다. 외화가 급격히 빠져나가면 환율이 급등하고 물가는 치솟게 된다. 주가 급락으로 금융시장이 흔들리면 실물경제까지 타격을 입게 된다.
최열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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