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해룡 경정 폭로 후 대통령실 개입 정황 등장…“필로폰 적발 역대급 성과인데 여당 침묵 의문”
야당에서는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여당은 정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정가에선 한동훈 대표가 어떠한 입장을 밝힐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마약 수사와 외압 의혹이 불거지던 당시 한 대표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한 바 있다.
경찰의 세관 마약수사 외압 의혹은 수사를 지휘했던 백해룡 전 서울 영등포경찰서 형사2과장(경정) 폭로로 알려졌다. 백해룡 경정은 2023년 9월 말레이시아 마약 조직원들을 붙잡아, 93만 명이 동시 투약할 수 있는 양인 총 27.8kg의 필로폰을 압수했다. 이어 조직원들 조사 과정에서 밀반입에 인천국제공항 세관 직원들의 협조가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수사를 확대, 윤희근 경찰청장으로부터 ‘훌륭한 성과’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백 경정에 따르면 세관 직원 연루 정황을 포함한 언론 브리핑을 준비하자 경찰 고위층과 관세청으로부터 ‘관세청 내용을 삭제하라’는 압박이 시작됐다고 한다. 언론 브리핑은 연기됐고, 뒤늦게 열린 브리핑에 세관 관련 내용은 모두 삭제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용산 대통령실까지 등장했다. 백 경정은 김찬수 당시 영등포경찰서장으로부터 “용산(대통령실)이 사건을 심각하게 보고 있으니 브리핑을 연기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조병노 당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경무관)으로부터는 “국감에서 야당 좋은 일만 시키는 것” “대통령실에서 또 전화가 왔느냐” 등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의혹은 7월 29일 조지호 경찰청장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제기되며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올라왔다. 인사청문회에 백해룡 경정과 조병노 전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 증인으로 출석해 대질이 이뤄졌다. 백 경정이 대통령실 개입 정황 관련 진술을 하자, 조 경무관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조병노 경무관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당시 김건희 여사 증권계좌를 관리했던 ‘선수’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 이종호 씨 녹취록에도 등장한다. 이종호 씨는 김규현 변호사와 통화에서 “조병호 서울 치안감. 별 두 개 다는 거 아마 전화 오는데 별 두 개 달아줄 것 같아. 그래도 또 우리가 그 정도는 주변에 데리고 있어야 되지 않냐”고 말했다.
이에 따라 조 경무관에 대한 승진 청탁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조 경무관은 “이종호 씨를 만난 적 없고, 간접적으로도 승진 로비를 한 적 없다”고 반박했다. 조지호 경찰청장 후보자 역시 “실제 조병노 경무관이 승진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관계 확인이 더 필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특별히 승진은 없었지만 이례적으로 징계를 피해간 정황은 보인다. ‘관세청 관련 문구 삭제’ 종용 의혹에 경찰청은 조 경무관을 감찰해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하지만 중앙징계위는 조 경무관을 징계 없이 ‘불문’ 처분하는 데 그쳤다. 지난 5년 동안 중앙징계위에 넘겨진 고위 경찰공무원 중 유일하게 징계를 피해간 사례다.
의혹이 일파만파 퍼지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8월 20일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청문회 증인에는 의혹을 폭로한 백해룡 경정을 포함해 △윤희근 경찰청장 △조지호 서울경찰청장(경찰청장 후보자) △강상문 전 서울경찰청 형사과장 △조병노 경무관 △김찬수 전 영등포경찰서장 등 경찰 고위관계자 28명이 이름을 올렸다.
행안위의 청문회 실시계획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통과됐다. 반면 국민의힘은 “정쟁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 적 없다”며 “직접적인 관련성이 떨어지는 증인을 부르고 있다”고 반발했다.
정가에선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번 의혹에 어떤 입장을 낼지에 관심이 쏠리기도 한다. 사건이 진행될 당시 한동훈 대표는 윤석열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초반부터 ‘마약 소탕’을 강조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10월 21일 경찰의날 행사에서 “‘마약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사흘 뒤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 회동에서도 “‘마약과의 전쟁’이 절실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10월 26일에는 국민의힘과 정부가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관련 당정협의회를 열고, 특별수사팀을 꾸리겠다고 밝혔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도 이에 호응해 대검찰청에 “마약범죄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대한민국이 다시 마약 청정국의 확고한 지위를 신속히 회복해야 한다”며 “전쟁을 치른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달라”고 엄정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앞서 2022년 9월 한 대표를 필두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시행령을 개정해 검사의 마약 관련 직접수사권을 유지했다.
이어 2022년 12월 제1차 국정과제점검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은 2015년 이후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다”라며 “정부가 지금부터 전쟁을 치르듯 하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23년 4월에는 “국가 전체 마약·조직범죄 대응 역량을 회복해야 한다”며 대검찰청에 가칭 ‘마약·강력부’를 조속히 설치하라 지시했다. 같은 달 열린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당정협의회에서는 “우리 정부는 (마약사범) 많이 잡을 것이다. ‘악’ 소리가 나게 강하게 처벌할 것”이라며, 특히 청소년 대상 마약범죄에 대해선 “가담한 정도 등을 가리지 않고 구속수사 하는 등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동훈 대표는 2023년 8월과 11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국내 마약류 범죄 실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엄벌을 강조했다.
이처럼 ‘마약과의 전쟁’에 목소리를 높여왔던 한동훈 대표가 이번 세관 마약수사 외압 의혹에는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 대표는 최고위원회의 등에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취약계층 전기요금 추가 지원·반도체 특별법 등 다양한 현안에 입장을 내고 있지만, 유독 이번 의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야권 한 관계자는 “영등포경찰서 백해룡 경정 팀이 검거한 밀반입조직원과 압수한 마약은 필로폰 단일 적발로는 역대급 성과”라며 “윤석열 정부는 취임 초 ‘마약과의 전쟁’을 실정에 대한 반전 모멘텀으로 삼은 듯 마약수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대표 역시 마약수사를 강조해왔다. 따라서 이 사건을 들여다보지 않았을 리 없다. 한 대표는 이번 의혹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복수의 국민의힘 관계자들은 “한동훈 대표가 세관 마약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동훈 대표에 연락을 취했지만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야당은 한동훈 대표에 압박을 가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은 8월 5일 “마약과의 전쟁을 강조했던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대표는 어디 갔는가”라며 “왜 마약 수사를 하는 곳에 대통령의 그림자, 용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지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국혁신당 정춘생 원내수석부대표 역시 한동훈 대표를 향해 “마약과의 전쟁이 진심이라면 이 사건 그냥 넘기지 말자. 국회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집권여당의 대표다운 면모를 보여 달라. 여야 합의로 국정조사요구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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