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회장 “대통령 주변에 일본 밀정 있다”…대통령실 “건국절 검토한 적 없다” 임명 철회는 거부
8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김형석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을 신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했다. 전날 5일 광복회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훈부에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독립기념관장 후보자 철회와 재선정을 요구했음에도 임명을 강행했다. 광복회는 이번 임명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후손 후보들이 부당하게 탈락했다고도 했다. 광복회는 오영섭 독립기념관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 위원장을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독립기념관장 후보자로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인사들을 추천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역사적 정의에 반하며, 선임 과정에서 독립 정신이 훼손되고 우리의 정체성이 유린당한 것”이라며 “임추위가 일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을 후보로 선정했다. 이는 헌법 정신을 부인하는 반헌법적 결정”이라고 했다.
김형석 신임 관장은 광복회에서 뉴라이트 계열 인사라고 지목한 인물이다. 김 관장이 일본 식민지배를 옹호하고 1919년 임시정부가 아닌 1948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주장했다는 것이 광복회 입장이다. 실제 김 관장은 2023년 12월 보수단체 강연에서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역사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라며 “1948년 8월 15일에 정부를 세우게 된 거예요. 거기서부터 대한민국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회는 김형석 관장 임명이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려는 사전 작업이자, 백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만들려는 음모라고 주장했다. 8월 14일 이종찬 회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단순한 하나의 인사가 아니라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계획”이라며 “15일에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이 출간된다. 김구 선생을 고하 송진우를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치켜세우고 이 기회에 김구는 죽여버리자, 이런 음모인 것 같다”고 말했다.
8월 13일 김형석 관장은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제가 영문을 모른 채 갑작스럽게 뉴라이트가 됐다. 뉴라이트 활동을 했던 행적도 없고 뉴라이트를 했던 분들도 우리 주변에 보지도 못했다”며 “1919년이 우리의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분들과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건국절을 제정해야 된다는 양쪽 분들에 대한 비판을 다 하고 있다. 저는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그분들의 활동과 독립 정신을 고양하는 그런 글들을 써왔던 학자”라고 해명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불거졌던 ‘건국절 논란’이 재연되면서 이종찬 회장과 윤석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충돌하는 양상이다. 이 회장은 ‘윤 대통령 멘토’라 불린다. 윤 대통령은 사석에서 그를 ‘아버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회장 아들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윤 대통령과 초등학생 때부터 죽마고우로 지냈다.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퇴임 후 3개월 만에 참석한 공식 행사도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개관식이었다. 이 회장은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이 회장은 대일 저자세 외교 논란이 일 때도 윤석열 정부를 옹호했다. 2023년 5월 이 회장은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대일 관계가 윤 대통령이 얻은 성과”라며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북한과의 평화를 강조하느라, 미국과 일본 동맹을 약화시켰다. 특히 일본을 철천지원수로 만들었다. 양쪽 균형을 맞췄어야 했는데, 안 맞았다. 윤 대통령이 균형을 맞춘 것”이라고 말했다(관련기사 [인터뷰] ‘윤석열 멘토’ 이종찬 광복회장 “한동훈 잘하지만 대선주자론 안돼”)
하지만 이종찬 회장은 윤석열 정부의 이념적 편향성을 보이는 거듭된 행보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해 윤 정부는 백선엽 장군의 ‘친일 기록’을 삭제하고, 육군사관학교 내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보훈·역사 주요 기관에는 뉴라이트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을 잇달아 임명했다.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이 거론된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건국절’이라는 뉴라이트 주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2023년 11월 1일 윤 대통령은 이승만 기념관 건립비용 500만 원을 기부하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7월 4일 한국자유총연맹 70주년 기념식에선 “광복 이후 격변과 혼란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이 땅에 자유의 가치를 심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말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상당한 배신감을 갖고 있다”며 작심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8월 10일 이 회장은 청년헤리티지아카데미 특강에서 “윤 대통령이 과거 전전(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과 전후 일본을 혼동하지 말자고 했지만, 최근 정부의 일련의 행동을 보면 이는 아니다”라며 “한국에 있는 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하여 오히려 전전 일본과 같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대통령 주변의 밀정들이 이 연극을 꾸민 것이라고 본다.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지 말라고 지금 항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요직 곳곳에 뉴라이트 인사가 포진한 것이 윤석열 정부 행보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 △김종석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장 △한오섭 전 대통령실 정무수석 등이 뉴라이트 인사로 분류되는 윤 정부 대표 인사들이다.
이종찬 회장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지금 은연중에 일어나는 인사들이 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며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뭐 하는 데인가. 우리 정신문화의 본산지다. 거기에 책임으로 이번에 새로 된 사람이 그 사람의 책을 반일종족주의라는 걸 한번 제가 봤는데, 피가 거꾸로 솟아오른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이걸 보니까 이건 완전히 ‘친일파들의 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을 끌 수가 없다”고 했다.
이어 이 회장은 “마지막 문은 열어놨다. ‘건국절은 없다, 잘못된 인사는 다시 하겠다’고만 하면 저희들이 박수친다”며 “제가 앞장서서 정부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계속 몽니를 부리면 안 되지 않냐. 나가자. (정부 주최 경축식) 식장에 나가서 또 제 기념사에서 이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 광복회원에게 용기를 달라고 호소하겠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논란 진화에 나섰으나, 김형석 관장 임명 철회에 대해선 거부했다. 8월 13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건국절 논란에 대해 “지금 경제도 힘들고 국민들이 먹고살기 힘든데 건국절 논쟁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통령실은 ‘건국절 제정’ 가능성에 대해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건국절 제정’을 추진할 의사도, 검토한 적도 없다”고 일축했다.
결국 국민 통합의 장이어야 할 8·15 광복절 행사는 정부 주최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개최 기념식으로 쪼개질 것으로 보인다. 광복회를 비롯한 37개 독립운동 관련 단체는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서 기념행사를 주최한다. 정부와 독립운동단체가 따로 개최하는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민주당 등 야당들도 김형석 관장의 임명을 철회하지 않을 시 정부 주최 경축식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이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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