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생명 건물 전경.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순환출자 방식의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크게 흔들린다. | ||
생보사 상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상장 차익 문제에 대한 자문위의 결론이 나오자 업계 인사들의 관심은 삼성생명에 쏠리고 있다. 업계 1위 기업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삼성생명의 상장은 삼성그룹 전체 판도를 좌지우지할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삼성그룹은 오랜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삼성자동차 채권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삼성그룹은 지난 1999년 6월 삼성차 법정관리를 선언하고 이건희 회장 명의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 출연을 발표했다. 채권단과 계열사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룹 총수가 사재를 출연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보증보험과 우리은행 산업은행 등 14개 금융기관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삼성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2조 4500억 원을 긴급 지원했다. 삼성차 법정관리 발표 당시 삼성은 이 회장 명의 지분 출연을 발표하면서 ‘곧 상장되면 주가가 70만 원에 이를 것이며 이는 채권단이 투자한 2조 4500억 원과 맞먹는 금액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즉,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줄 테니 상장되고 나면 이를 팔아서 투자 원금을 회수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삼성생명 상장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채권단은 결국 원래 회수하려 했던 2조 4500억 원과 이자를 합해 6조 원에 이르는 금액 청구소송을 이 회장과 삼성을 상대로 진행하게 됐다. 만약 삼성생명이 상장돼 주가 70만 원을 기록하게 되면 삼성과 채권단 간의 법정공방도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삼성생명 상장이 삼성그룹의 오랜 고민을 털어낼 호재임엔 틀림없지만 삼성그룹과 이 회장에게 또 다른 난제를 안겨줄 가능성도 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식의 순환출자를 통한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주식이 시장에 풀리게 되므로 지분에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라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셈이다.
삼성생명 지분구조를 보면 이건희 회장이 4.54%, 삼성에버랜드가 13.34%를 가진 것을 필두로 이 회장 우호지분이 총 30.94%에 이른다. 하지만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 국회통과에 따라 비금융계열사가 금융계열사 지분 5% 이상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에버랜드는 삼성생명 지분 8.34%를 처분해야 한다.
그룹 지배구조 안정을 위해 이 회장 우호세력이 이 8.34%를 회수해야 하는데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주가 폭등과 여러 자본의 침공 등이 우려될 수밖에 없다. 지분의 안정적 수호가 여의치 않을 수 있는 셈이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르면 금융지주회사는 물론 그 자회사도 제조업체 지분을 보유할 수 없다. 현재 삼성생명이 갖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7.2%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학계 일각에선 생보사 구조조정과 관련해 삼성생명이 갖고 있는 ‘부동산과 진배없는’ 계열사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생보사의 자산이 계열사 주식 매집에 묶여 사실상 부동산보다 더 유동성이 낮은 고정자산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삼성생명은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자산 매각과 보험상품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 구조조정엔 계열사 지분 매각은 빠져있었다. 그만큼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삼성생명이 쥐고 있는 돈의 힘이 컸던 것이다.
어쨌든 삼성 입장에선 삼성생명 상장으로 삼성차 채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삼성생명의 주식매각으로 삼성차 채권 빚잔치가 가능해진다면 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화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에버랜드의 자회사인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식으로 이뤄지는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붕괴를 의미한다.
삼성생명을 축으로 돌아가는 그룹 지배구조를 무너뜨리지 않는 동시에 삼성차 채권 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을까. 일단 삼성생명 대신 다른 계열사를 순환지배구조에 끼워 넣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삼성생명과 같은 요건을 갖춘 법인을 찾아내기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삼성에버랜드는 핵심 계열사들 지분을 두루 갖고 있다. 그러나 삼성생명 지분(13.34%)이 두드러질 뿐 삼성테크윈(0.31%) 삼성중공업(0.13%) 삼성엔지니어링(1.07%) 등에 대한 지배력은 미약한 수준이다. 반면 핵심 계열사가 아닌 소규모 법인들에 대한 에버랜드의 지배력은 절대적인 편이다. 에버랜드는 크레듀(11.55%) e삼성인터내셔널(25%) 가치넷(20.96%) 시큐아이닷컴(8.86%) 등 법인들에 대해 경영참가 목적의 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사들이 ‘1% 지분 매집에 9000억 원이 소요되는’ 삼성전자 지분을 과연 삼성생명이 지닌 7.2%만큼이나 확보할 여력이 있을까에 의문 부호가 붙는다.
이렇게 되면 삼성에버랜드→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 식의 지배구조가 형성된다. 삼성생명 또한 삼성전자 지분을 그대로 보유해 삼성전자에 대한 이 회장 측 의결권이 줄어들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
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지분을 팔고 삼성전자 지분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발생될 거액의 양도세도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삼성생명을 비롯한 금융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구조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삼성생명은 삼성화재(10.04%) 삼성증권(11.38%) 대구은행(7.36%) 삼성투신운용(5.49%) 삼성선물(41%) 삼성카드(35.06%) 등의 주요 금융계열사 지분을 골고루 보유하고 있다. 얼마 전 권오승 공정위원장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제 전환을 권유하면서 삼성전자그룹 삼성생명그룹 삼성에버랜드 등 3개 지주사 그룹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금융 소그룹화, 즉 삼성생명그룹을 만들기엔 삼성생명이 지주회사로서 갖춰야 할 지분의 양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삼성화재나 삼성증권 등 주력 금융계열사들의 지분을 더 확보해야 안정적 지주회사제가 가능한데 여기에 투입될 금액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삼성그룹 내에서 소그룹화를 통한 지주회사제 전환 문제를 놓고 논의가 있었다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조기 현실화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까닭에서 일부 재계 인사들은 삼성이 보유한 공익재단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이건희 회장 막내딸인 고 이윤형 씨 유산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지분 일부를 증여받아 지배구조의 새로운 축으로 거론되기도 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옛 삼성이건희장학재단), 얼마 전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 타계 이후 그 유산을 증여받은 삼성생명공익재단, 그리고 핵심 계열사 지분을 고루 갖고 있는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공익재단들은 증여세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유사시 에버랜드나 삼성생명의 계열사 지분을 증여받아 지배구조의 축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비영리재단은 특정 법인 지분 5% 이상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 걸린다. 이런 까닭에서 이 재단들이 각각 주요 계열사 지분 5% 씩을 확보한 뒤 한 묶음으로 움직이면서 최대 20%에 해당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그려볼 수도 있다.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그룹 내 금융군 소그룹보다 공익재단 소그룹이 먼저 탄생될 것’이란 우스갯소리마저 나도는 실정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