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래, 고가매수→취소 반복 거래량 늘려…의심 거래 ‘동일 계좌’ 자주 등장…금감원 “근거 부족 조사 불가”
#"날 잡고 프로그램 통해 패대기"
지난 8월 5일 발생한 주가 폭락 사태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코스피는 전장 대비 8.77% 하락해 2441선까지 떨어졌다. 한국거래소가 '서킷브레이커'(거래 일시중지)까지 발동했음에도 역대 최대 낙폭을 막지는 못했다. 꼭 일주일 지난 8월 12일부터 간신히 2600선을 회복했다. 하지만 함께 급락했던 미국·일본·유럽 등과 비교하면 회복세는 확연히 더딘 편이다. 이들 해외 국가는 약 4거래일 만에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한국의 경우 시장 불안 심리가 대세인 탓에 이같이 전개됐다는 분석이 크다.
대폭락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분하다. 금융당국 등에선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저렴한 엔화로 사들인 해외 자산을 되파는 현상)에 따른 유동성 경색 우려 탓으로 진단했다. 하지만 투자자들 사이에선 프로그램을 활용한 알고리즘 매매가 문제였다는 분석이 적지 않았다. 프로그램 매매는 특정 알고리즘을 입력하면 그대로 거래가 이뤄지는 특징이 있다. 가령 '경기 침체가 예상되면 판다'고 설정하면 그대로 실행되는데, 최근 급락 사태 때도 이런 영향이 반영됐다는 주장이다.
실제 각 증권사들의 HTS(홈트레이딩시스템) 등을 보면, 급락 사태 때 매물 상당수가 '프로그램 매매'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국내 반도체 대장주 격인 삼성전자만 봐도 8월 1일 프로그램 순매수가 마이너스(-) 307만 주, 8월 2일 -247만 주를 이어가다 급락 당일인 8월 5일 -544만 주까지 기록했다. SK하이닉스 역시 8월 2일 -107만 주에 이어 8월 5일 -12만 주가 시장에 내던져졌다. 업계에선 "레이스를 주도하던 이들이 날 잡고 주식을 패대기쳤다"는 말이 파다했다.
#의심 거래 4개 기업 매매·체결장 살펴보니
프로그램 매매를 대표하는 방식이 DMA 거래다. 구체적 통계는 없지만 업계에선 프로그램 매매 절대 다수를 DMA 거래가 차지하고 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실제 금융감독원도 2023년 1월 처음으로 DMA를 활용해 국내에서 시세조종 행위를 한 해외 증권사를 적발해 118억 원의 과징금을 조치한 적이 있다. 서울남부지검은 올 3월 DMA를 통해 불법 공매도를 벌인 HSBC 홍콩 법인과 트레이더 3명을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DMA는 주식을 주문할 때 '적정성 점검'을 간소화해 체결이 빠른 게 특징이다. 그러나 주식 계좌의 잔고마저 점검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사실상 '무차입 공매도'가 가능한 셈이다. 게다가 예수금이 없는 상태에서 매수도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거래량이 늘면 주식 급등 혹은 급락에도 영향을 주게 돼 시장이 교란될 수 있다. 특정 종목에서 단기간 급증 및 급락이 반복될 때마다 DMA가 배후로 의심받아 온 이유다(관련기사 초전도체 등 테마주 급등락 뒤에 '알고리즘 매매' 있었나).
다만 금융감독원은 지난 5월 3일 글로벌IB의 불법공매도 중간조사 결과 발표에서 "글로벌IB 공매도 주문 대부분은 DMA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도 "DMA는 기계적인 주문 방식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특히 "아직까지 국내 증권사가 DMA 주문으로 불법공매도를 한 흔적은 확인된 바 없다"며 "한국거래소도 DMA 거래를 계속 모니터링하는 중으로 위법 발견 시 조치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즉, DMA 등 프로그램을 활용한 시세조종 세력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국내 주식 시장의 장막을 벗겨보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일요신문은 2020년 1월∼2023년 6월 시세조종 등이 의심돼 거래가 일시 중지된 적 있는 4개 기업의 주식 매매장과 체결장을 입수했다. 그 결과 DMA 등 프로그램을 활용한 거래가 주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만한 정황들이 여럿 드러났다. 특정 계좌가 하루에만 수십 차례 거래를 반복, 고가매수 이후 취소 등을 되풀이한 흔적들이다. 종목 거래량을 늘리고자 자기주식을 자기한테 파는 자전거래 내역도 다수 확인됐다.
지난 8월 기준 시가총액 약 2000억 원 규모인 A 기업의 경우 2023년 3월부터 49거래일 동안 프로그램 매매를 통한 '고가매수' 횟수만 1213회에 달했다. 특이하게도 고가매수 뒤 취소한 횟수도 472회에 이르렀다. 이는 DMA 등 프로그램 매매로 주가를 한껏 끌어올리고 취소하기를 반복하며 거래량을 늘렸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실제 이 짧은 기간 A 기업 주가는 3배가량 올랐다. 프로그램으로 가장 많이 고가매수한 계좌 상위 5개는 전부 '외국인' 소유였다.
이 밖에 B(2024년 8월 기준 시가총액 약 1000억 원), C(약 800억 원), D(310억 원) 기업들도 같은 흐름을 보였다. 프로그램을 통한 고가매수가 B 기업은 841거래일 4705회, C 기업은 749거래일 동안 4071회, D 기업도 842거래일 동안 3349회씩이나 됐다. 이들 각 기업에서 가장 많이 프로그램으로 고가매수한 상위 8개 계좌를 따로 떼어내 분석하면, B 기업은 해당 10개 계좌가 1632회에 걸쳐 고가매수를 했다. C 기업은 2307회, D 기업은 635회였다.
자기 주식을 자기한테 매도한 '자전거래' 내역도 상당 부분 확인됐다. B 기업은 2020년 1월부터 5월까지 76회, D 기업은 2020년 1월부터 7월까지 41회에 걸쳐 매도인과 매수인 계좌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이 거래된 주식은 B 기업이 4696주, D 기업이 4463주에 달했다. 역시 외국인 계좌가 대부분이었는데 국내 개인 투자자도 없진 않았다. 게다가 이는 그나마 일부 자료만 분석한 '최소' 숫자일 뿐이다. 4개 기업의 약 3년 6개월 치 거래를 전수 분석하면 자전거래 내역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다시 등장한 '그때 그 외국인 계좌'
또 눈에 띄는 부분은 이들 4개 기업 주식 거래 내역에서 동일한 계좌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JP모건의 '1017XXX' 계좌와 UBS증권의 '1011XXX' 계좌 및 신한증권 '0155XXX' 계좌 등이 공교롭게도 A, B, C, D 기업 거래 내역에 전부 등장한다. 모두 외국인으로서 이들 또한 DMA 등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차례 고가매수에 나섰다. 이 자료를 확인한 한 증권사 부장은 "외국의 특정 집단이 국내 매우 많은 종목에서 DMA 등을 통해 시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특히 신한증권 '0155XXX' 계좌는 과거 조광피혁 주가조작 사건 당시 법정에서 공개된 주식 매매·체결장에도 등장한 바 있다. 이 계좌는 2014년 2월부터 2015년 8월까지 2887회 주문을 넣고, 2741회를 취소했다. 수량으론 총 3만 7693주를 주문하고, 이 가운데 2만 2873주를 취소했다. 한 차례 주문할 때마다 8∼13주 정도의 소량을 거래했다. 이를 수천 차례 사고 취소하기를 반복한 셈이다. 고가매수 주문도 476회에 달했다. 일반적이지 않은 투자 흐름이었지만 당시 수사 대상에선 제외됐다.
금감원에 따르면 해당 계좌가 여러 종목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단, 기관투자자로 추정된다는 점 외엔 확인 가능한 사항이 없다고 한다. 금감원은 또 수차례 매수와 취소를 반복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세조종 여부 등을 조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세조종에 해당하는지는 거래 목적이 다른 투자자를 지속적으로 유인하려는 데에 있어야 한다"며 "고가매수를 여러 번 제출했다고 시세조종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투자자들 사이에선 금감원이 DMA 등 프로그램 거래 실태를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하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회장은 "투자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개인과 기관·외국인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각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너무 소극적이란 인식이 만연하다"며 "DMA 등이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지만, 무차입 공매도 등 시세조종에 관여할 여지는 크므로 금융당국의 적극적인 감독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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