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만 명 중 600만 명 한반도 작업장 8000곳 배치…정부 차원 발굴·보존 노력 부재로 대부분 흔적조차 없어
#국가 차원의 인신매매
일본제국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며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먼저 동원 가능한 노동자 수를 조사했다. 일본 기업은 일본 후생성에 필요한 노무자 수를 요청했다. 이를 후생노동성이 총독부에 전달했다. 총독부는 지방행정기관을 동원해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총독부는 노무자를 사업장으로 수송하는 업무까지 관리했다.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은 토건 현장, 광산, 군수공장 등에 배치됐다. 미쓰비시 등 기업들은 ‘선대금’을 노무자들에게 부과했다. 선대금에는 수송에 들어간 교통비, 식비, 작업복인 ‘국민복’ 비용, 곡괭이 등 장비, 숙소 숙박비 등 생활과 노동에 필요한 모든 항목이 들어가 있었다. 이 금액은 노무자들의 1년 치 급료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일본 정부는 임금에서 우편저금과 후생연금도 공제했다. 우편저금은 청일전쟁 이후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사용됐다. 후생연금 제도도 명목상으로는 한국의 국민연금 같은 노동자를 위한 부조 제도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비로 사용됐다. 여기에 더해 총독부는 100엔을 갹출했다. 당시 총독부는 일본 정부 예산으로 운영됐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예산이 삭감됐다. 총독부는 이 비용을 기업에 노무자를 제공한 다음 임금의 일부를 가져가는 방식으로 삭감된 부분을 충당했다. 국가 차원의 인신매매였던 셈이다.
노무자들은 하루 10~16시간 일했다. 잡곡과 질 낮은 쌀이 섞인 식사로 연명했다. 그마저도 양이 부족했다. 먹는 것이 없어 대변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배급됐던 쌀을 관리자들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병이 들면 배급량이 더 줄어들었다. 관리자의 폭력은 일상이었다. 사고로 사망하면 관청에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일본 정부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노무자의 죽음은 보고서에 ‘손실’로 기록됐다. 관리자들은 대부분 개인의 부주의로 손실이 발생했다고 기록했다(관련기사 [인터뷰] 국내 유일 사도광산 연구자 정혜경 “강제성 빠져 아쉽지만 디테일 확보 진전”).
숙소는 일본어로 ‘다코베야(문어방)’라고 불렸다. 문어는 먹이가 없는 밀폐된 장소에 갇히면 살아남기 위해 자기 다리를 뜯어먹는다는 속설이 있다. 8개 다리를 모두 뜯어먹는 데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먹을 다리가 없으면 굶어 죽게 된다. 문어방은 다리를 뜯어먹을 정도와 유사한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용어였다. 메이지 시대 초기 홋카이도 개척 때 처음 나온 강제노동 형태다.
이러한 비유가 나올 만큼 노무자들의 숙소는 열악했다. 좁은 방에서 100명 이상이 거주한 숙소도 있었다. 전염병은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견디지 못하고 탈주하면 다시 붙잡혀 들어와 동료들 앞에서 구타당했다. 폭동을 일으키면 군경에 의해 진압 당했다. 노무자들은 2년짜리 계약에 묶여 이 같은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2년이 지나도 계약은 자동으로 갱신됐다.
#철거되거나, 방치되거나
그동안 강제동원 문제는 일본 지역 사업장을 위주로 조명됐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도광산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에 배치된 노무자 규모가 가장 컸다. 당시 노무자들이 동원된 지역은 한반도, 일본, 중국, 사할린,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이다. 총 753만 4429명이 동원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 약 640만 명이 한반도에 있는 작업장에 배치됐다. 약 100만 명은 일본으로 이동했다.
강제동원이 있었던 한반도 내 작업장은 8329개소로 파악됐다. 일본은 4119개소다. 작업장을 운영한 주요 기업은 미쓰이(129개소), 미쓰비시(110개소), 스미토모(32개소), 일본제철(25개소), 니시마쓰구미(23개소) 등이다. 모두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기업들이다. 미쓰이그룹, 미쓰비시그룹, 스미토모그룹은 일본 3대 재벌로 꼽힌다.
미쓰비시제강이 운영했던 인천광역시 부평구 군수공장 건물 7개 동은 국내에 있는 대표적인 강제동원 유적지다. 부평동 일대는 지금도 ‘삼릉’이라고 불린다. 삼릉은 일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의 한자 표기다. 미쓰비시제강은 이곳에서 군수공장인 인천제작소를 운영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이곳에서 일본제국 육군에 공급할 무기를 제작했다. 생산된 무기는 인천 육군조병창에 납품됐다. 현재 군수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부평공원이 들어서 있다. 강제동원 흔적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공장 건물은 1989년 철거됐다. 건물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작업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0년 공원조성 사업을 거쳐 이 자리는 부평공원이 됐다. 한국이 강제동원 증거물을 스스로 지워버린 셈이다. 2017년에는 부평공원 징용노동자상이 설치됐다. 노동자상은 이 장소가 강제동원 사적지라는 것을 알리는 유일한 표식이다. 인천시 부평공원 소개 페이지에는 강제동원 관련 설명은 나와 있지 않다.
이곳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합숙소인 ‘미쓰비시 줄사택’은 철거될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인천시가 공용주차장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다. 그동안 이곳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장소지만, 방치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합숙소는 허물어지기 직전의 빈집처럼 보였다. 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예정’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었다. 한 주민은 그동안 이곳을 관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다만 8월 10일 국가유산청이 이곳을 국가등록 문화유산으로 정하면서 체계적인 정비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가 무기를 납품했던 육군조병창에 설치했던 병원은 일부만 존치될 예정이다. 노무자들이 치료받았던 병원이다. 이 일대는 광복 이후 미군이 사용했다가 한국 정부에 반환했다. 반환된 다음 병원을 철거하고 이 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추진됐다. 이에 병원을 존치해야 한다는 지역 시민단체의 요구가 나왔다. 문화재청(국가유산청 전신)도 존치를 권고했다. 이에 병원 건물 일부를 존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전해졌다.
한반도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장인 광산은 대부분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탄광 등 광산은 5504개소로 가장 많았다. 남한 지역에만 약 3000개의 광산이 운영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8월 16일 기준 국가유산포털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된 광산은 ‘영양 구 용화광산 선광장’뿐이다. 이곳은 일본광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한 광산 시설이다. 금 은 동 아연 등이 생산됐다. 2006년에 등재됐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정문화재 외의 문화재다. 일제강점기 이후 생성된 유적이 주로 등재된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는 토목회사들이 운영한 사업장의 흔적도 대부분 사라진 상태라고 전했다. 철도 및 도로 관련 사업장과 토목 관련 사업장은 약 470개소가 운영됐던 것으로 집계됐다.
하자마구미 조선지점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업소로 보인다. 이 지점은 서울 용산우체국 뒤편에 있다. 하자마구미는 이곳에 사업소를 두고 철도시설, 관계시설, 학교 등 건축 용역을 수주했다. 대표적인 사업은 1937년 완공한 한강대교와 1943년 완공한 수풍 수력발전소다. 하자마구미는 지금도 운영 중이다. 현재 이 장소는 한 식자재 기업이 사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국가유산으로 등재돼 있지 않다.
이 같은 사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어디에 어떤 강제동원 유적지가 있는지 정리된 자료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관련 활동을 총괄했던 앞서의 강제동원 위원회는 2015년 활동이 종료됐다. 대부분의 기능은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로 이관됐다. 그러나 지원과 관계자는 국내 강제동원 유산 발굴 및 보존 업무는 과 소관이 아니라고 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국가유산청도 같은 입장이었다. 재단 관계자는 일부 강제동원 관련 지역을 현장조사를 한 적은 있지만, 이를 직접 발굴하고, 국가유산으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것은 국가유산청의 업무라고 했다.
그러나 국가유산청에도 강제동원을 전담해 발굴하고 보존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없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 신청을 받으면 심사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유산에 올린다. 일부 강제동원 유적지는 개인 사유재산인 경우가 있어 지자체가 강제로 문화유산 등록 요청을 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다고 전했다. 강제동원 관련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업무는 2015년 위원회 활동 종료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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