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트리거’…대통령 강행, 야당엔 ‘호재’…대통령실 “반쪽 표현도 잘못”
8·15 광복절이 79년 만에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광복절을 기리는 정부 주최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주관 기념식이 별도로 열렸다. 정부 주최 광복절 경축식은 15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문회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윤석열 대통과 김건희 여사를 비롯해 주호영 국회부의장, 한동훈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 각 부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반면 독립유공자 후손 단체인 광복회 등 56개 독립운동단체연합은 같은 시각 서울 용산구 소재 백범기념관에서 자체 광복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우원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등 야6당 정치인들이 함께했다.
발단은 ‘3대 역사기관’ 한국학중앙연구원(김낙년 원장) 국사편찬위원회(허동현 위원장) 동북아역사재단(박지향 이사장)을 비롯해 주요 역사기관 요직에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발탁되면서다. 야권은 물론 보수진영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던 중 김형석 교수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트리거가 됐다.
야권 한 관계자는 “3대 역사기관 수장에 뉴라이트 계열 사람들을 앉힌 것도 큰 문제지만, 연구는 학문의 논쟁 영역으로 넓게 봐줄 수 있다”며 “하지만 독립기념관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와 광복을 알리고,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기관의 수장에 친일파를 옹호하고 일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인물이 온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8월 10일 청년헤리티지아카데미 특강에서 윤 대통령의 국책기관 인사 문제에 대해 “뉴라이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신판 밀정’”이라며 “대통령 주변 밀정들이 이 연극을 꾸민 것이라고 본다”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과의 친분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수위가 높은 발언이었다. 이종찬 회장은 윤석열 정부가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항의의 뜻으로 광복절 경축식 불참을 결정했다.
이 회장은 15일 광복회 주관 경축식 기념사에서 “최근 왜곡된 역사관이 버젓이 활개 치며, 역사를 허투루 재단하는 인사들이 역사를 다루고 교육하는 자리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며 “준엄하게 경고한다.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으며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투쟁과 헌신, 그 자랑스러운 성과를 폄훼하는 일을 국민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종찬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부친이다. 윤 대통령이 사석에서 그를 ‘아버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이 대선 출마할 때 가장 먼저 지지 선언을 한 보수진영 인사 중 한 명이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그만둔 후,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할 때마다 이 회장으로부터 조언을 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수 인사들도 우려를 표하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윤 대통령이 왜 고수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제기된다. 한 전직 보수정당 의원은 “뉴라이트 관련 역사관 논쟁은 정통 보수층에도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박근혜 정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국정교과서 등 역사 문제를 건드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지지율 반등이나 국정동력 확보에 도움도 안 되는 논란을 왜 계속 이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여권 내에선 윤 대통령이 한·미·일 동맹이라는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또 다른 야권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는 취임 이후 2년 넘게 내놓은 성과가 없다. 그나마 내세울 게 수차례 해외순방 다닌 외교다. 그중에서도 한·미·일 동맹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군사동맹까지 나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국민정서상 한·일 군사동맹은 추진하기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이들이 뉴라이트 성향 인물들이다. 그러다보니 성과가 필요한 윤 대통령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을 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보수진영에서조차 쓴소리가 나오지만 윤 대통령은 국정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 대통령은 15일 행사 경축사에서 “자유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허위선동과 사이비 논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른바 가짜뉴스에 기반한 허위선동과 사이비 논리는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흉기다. 선동과 날조로 국민을 편 갈라, 그 틈에서 이익을 누리는 데만 집착할 따름”이라며 “검은 선동 세력에 맞서 자유의 가치 체계를 지켜내려면, 우리 국민들이 진실의 힘으로 무장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 나와 정부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한 고위인사는 “사회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과 국정에 반영하기보다, 본인과 생각이 다르면 다 허위선동 사이비 논리를 내세우는 검은 선동 세력이라고 판단해 싸우겠다는 것 아니냐”며 “정치권에 극한 대립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박찬대 민주당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광복절이 친일부활절로 전락했다”며 “그 책임이 윤석열 대통령에 있다”고 날을 세웠다. 박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총력을 다해 윤석열 정권의 망국적 친일매국행위에 강력히 맞서겠다”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뿌리를 도려내는 모든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하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공식적으론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윤 대통령의 이러한 스탠스가 호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중도층은 물론, 보수진영에서조차 반발하는 기류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윤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때 대거 수면 위로 나왔던 뉴라이트 인사들을 중용하면서 스스로 점수를 깎아먹고 있다”면서 “역사, 특히 일본 문제는 국민들 감정선에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다. 윤 대통령이 악수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친일’을 선동하고 있다면서 반박했다. 나경원 의원은 8월 15일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이 하나 돼 기뻐할 날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좌파들은 우파 정권에 대해 끊임없는 친일 몰이를 해왔고, 시작은 늘 이승만 정권이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한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광복절 논평을 통해 “민주당 등 야당이 나라의 빛을 되찾은 기쁜 날인 오늘까지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선동에 여념이 없다”며 “무책임한 태도에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퇴색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국민통합의 정신을 이어가야 하는 오늘만은 소모적 정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도 이번 광복절 기념식이 ‘반쪽 행사’라는 지적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특정단체가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반쪽 행사라는 표현은 잘못됐다고 본다”며 “대통령이 참석한 행사가 공식 행사”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국민이 광복의 기쁨을 나눠야 할 광복절에 친일프레임을 덧씌우고 이를 틈타 국민 분열을 꾀하는 정치권의 행태 역시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있지도 않은 정부의 건국절 계획을 철회하라는 억지 주장에 대해서는 엄정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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