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으로부터 매달 받아 빈민·학생·공익단체 등에 기부…“지금 정치권이 배워야 할 중요 사례”
장부는 육 여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매달 받은 활동비로 어려운 국민을 돕거나 사회단체 등에 기부한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육 여사는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20만 원을 받으면 이를 빈민, 나환자, 학생, 공익단체 등에 나눠줬다. 육 여사는 자신에게 매일 오는 민원 편지들을 읽고 활동비 용처를 정했다고 한다.
김 전 비서관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세간에 ‘어려운 일 있으면 대통령보다 영부인한테 편지하라’는 소문이 났다. 대통령에 보낸 편지는 민정수석실에서 스크린하지만, 육 여사는 직접 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많을 땐 하루 40통씩 오는데 저와 비서 2명이 편지를 전부 뜯어보고 내용을 발췌한 뒤 원본을 붙여 여사께 보고한다. 육 여사가 저녁 때 그걸 다 본다. 아침에 출근하면 ‘OOO 할머니께 쌀 한 가마 보내주세요’ 같은 지시가 내려와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관은 기억이 남는 사연도 소개했다. 그는 “서울 서부경찰서 말단 순경의 사연이 기억난다. 형편이 어려워 단칸방에서 순경과 부인, 시아버지가 함께 잔다. 남편이 당직 서는 밤이면 며느리가 잘 곳이 없어 부뚜막에서 쪼그리고 잔다. 영부인이 그 편지 보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방 하나 더 얻게 30만 원 보내주세요’라고 해서 내가 직접 돈을 전달했다. 그때로선 큰돈”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보도한 장부 내용에 따르면 1972년 11월 3일 서대문 오 아무개 씨에게 백혈병 치료비로 2만 원, 1973년 3월 의정부시 김 아무개 씨에게 수술비 1만 원, 1973년 4월 8일 나주여중 3학년 정 아무개 양에게 학비 1만 8160원 등이 지급됐다. 이 밖에 정박아 부모회에 매달 2만 원, 서울의대 봉사활동(1972년 7월 29일)에 8만 원이 지급됐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영부인으로서의 이런 육 여사 행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도마에 오른 전·현직 대통령 영부인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특활비 논란 등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김 전 비서관은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의 고급 의상 특활비 전용 논란에 대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1973년 1월 하와이 이민 70주년 행사가 열려 큰 영애(박근혜)가 대통령 특사로 갔는데, 내가 수행했다. 한복을 5~6벌 갖고 갔는데 전부 육 여사가 입던 옷들이라 놀랐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이다.
“여사가 손수 재봉틀을 돌려 기장을 맞춰놓고 ‘행사별로 무슨 무슨 옷 입으라’고까지 적어줬다. 여사 옷은 전부 저렴한 국산 옷감을 손수 디자인해서 가까운 양장점에 맡겨 만든 것들이었다. 양장점이 알려지면 손님들 몰릴까 봐 이름도 안 밝혔다. 백도 전부 국산만 들고 다닌다. 큰돈 들어갈 일 없으니 특활비 논란이 날 수가 있겠느냐.”
김정숙 여사는 2019년 9월 라오스 방문 때 공항 환송식에서 문 대통령보다 서너 걸음 앞서 걸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두영 전 비서관은 “육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한 행사에는 손도 안 들었다. 동선도 늘 대통령 두세 발짝 뒤다. 유튜브 동영상 보면 다 나온다. 본인만의 일정엔 경호도 일체 못하게 하고 나만 대동했다. 한번은 북한이 빤히 보이는 강화도에 가는데, 걱정돼 경호실에 부탁해서 권총을 받아 가려 했다. 여사에게 보고하자 ‘평소대로 하라’고 해 결국 못 가져갔다”고 말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선물’과 관련해선 김 전 비서관은 “육 여사는 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하는데, 선물 가져온 이를 본 적이 없다. 아예 안 된다는 걸 다들 알고, 또 만나는 분들이 수준 있는 분들이니 불상사 날 일이 없다”면서 “양주동 박목월 봉두완 등 교수·작가·언론인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자주 들었다. 그분들이 책 들고 온 건 봤다”고 말했다.
영부인에 의한 인사 개입은 모든 정권마다 반복됐던 문제들이다. 이를 예방하고 감시하기 위해 민정수석실 등 청와대 내부 장치가 있긴 했지만 살아있는 권력을 막기엔 실효성이 없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 전 비서관은 “육 여사 추천으로 누군가 장관, 의원이 됐다면 다 알려졌을 텐데, 그런 일은 기억나는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가 특활비를 떠올렸을 때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국정농단 등 특활비 논란이 (여러 차례) 불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의 (중앙일보) 보도를 보고 특활비 본래 목적이 이런 것도 있구나라고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대통령 영부인은 선출 공직자는 아니더라도 분명 공인에 속한다. 공인으로서, 특히 대통령 배우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육 여사가 잘 보여줬다. 옛날이지만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윤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육 여사의 행동은) 자신의 직책과 직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나오기 힘든 것으로, 지금의 정치권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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