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축소 ‘캐즘’ 이어 ‘포비아’ 확산 악재…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 개발 속도 주목
#인천 청라 화재 사고의 파급력
인천 청라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불이 났던 차량은 메르세데스-벤츠 EQE 350+ 모델이다. 이 화재로 72대가 전소되고 5개 동 480세대가 피해를 입었다. 국내에서 전기차 화재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화재의 파급력은 컸다. 특히 해당 차종에 당초 알려진 세계 시장점유율 1위 CATL의 배터리가 아닌 점유율 10위권의 파라시스 배터리가 장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전기차에 탑재된 배터리 공개 요구가 빗발쳤다.
상대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인 국산차 브랜드와 달리 수입차 브랜드는 탑재된 배터리가 무엇인지 공개하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불안과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수입차 브랜드도 결국 하나둘씩 자사 전기차 모델에 탑재된 배터리의 제조사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국토교통부 자동차 리콜센터 누리집의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현황’과 한국교통안전공단 등에 따르면 지난 8월 16일 오후까지 국내외 브랜드 21곳이 총 69종의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브랜드가 배터리 제조사를 공개한 셈이다. 배터리 제조사가 공개된 모델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제품을 탑재한 모델은 총 43종(62.3%)이었다. CATL과 파라시스 등 중국 배터리를 장착한 모델은 17종(24.6%)이었다.
전기차 제조사 별로 살펴보면 현대차는 코나에만 CATL 배터리가 쓰였고 나머지 모델에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의 배터리가 탑재됐다. 기아는 레이와 니로 전기차에 CATL 배터리가, 나머지 모델에는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배터리가 사용됐다. KG모빌리티의 전기차에는 중국 비야디(BYD)의 배터리가 탑재됐다. 메르세데스-벤츠 EQE를 비롯해 중국 파라시스의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는 EQE, EQS, EQE SUV 3종으로, 모두 벤츠 전기차 모델이다. 이들 차종에는 CATL의 배터리도 함께 쓰였다. 테슬라 국내 판매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모델 3과 모델 Y에는 LG에너지솔루션, 파나소닉, CATL의 배터리가 모두 사용됐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구매할 전기차의 배터리 제조사를 알 수 있게 됐지만 배터리 제조사 공개만으로 안전성 논란을 불식시키는 어려울 전망이다. 같은 차종이라도 배터리 제조사가 다를 수 있고 국산 배터리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전기차 화재 원인이 단순히 배터리 결함 자체만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용주 국민대학교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전기차 배터리가 아닌 또 다른 전기장치에 의해 화재가 날 수 있다”며 “내연기관 차의 경우 불이 연료통까지 번져서 폭발하는 것처럼 전기차도 외부에서 배터리까지 불이 번져서 폭발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배터리 실명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호근 대덕대학교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단순히 배터리 제조사만 공개한다고 해서 소비자에게 실질적으로 도움 되지 않는다”며 “LFP 배터리, 삼원계 배터리같이 종류가 무엇이고, 제조 공장이 어디인지 등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기차 제조사, 안전성 강조 정면돌파
국내 전기차 시장은 이른바 ‘캐즘(일시적 수요둔화)’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6.5% 하락한 6만 5557대로 집계됐다. 올해 하반기 중저가 전기차 신차를 앞세워 부진을 만회하려던 국산차 브랜드와 할인을 통해 고객을 유인하려던 수입차 브랜드 입장에서는 최근 분위기는 큰 악재일 수밖에 없다.
전기차 제조사들은 자사 전기차의 안전성을 강조하고 정면돌파에 나선 모양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이번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 8월 15일 별도 자료를 통해 현대차∙기아는 최근에 개발된 순간 및 미세 단락을 감지하는 기술이 배터리 화재 사전 감지에 큰 효과가 있다고 판단, 신규 판매 차량에 적용하고 판매된 전기차에도 연말까지 업데이트 툴 개발을 완료해 순차적으로 확대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테슬라 역시 고객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BMS(배터리관리시스템)를 통해 배터리 이상 증상이 감지되면 테슬라코리아는 고객에게 이를 알리고 긴급 출동 서비스나 서비스센터 예약 등의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며 “이런 조처는 잠재적인 피해를 예방하거나, 최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이상 증상에 대한 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에서는 화재 진압을 어렵게 만드는 배터리 열폭주를 지연하거나 억제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현재 전기차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는 액체 전해질이 사용된다. 고체와 액체 중간 형태의 전해질을 사용하는 ‘반고체 배터리’와 고체 전해질만 사용하는 ‘전고체 배터리’는 액체 전해질 배터리에 비해 화재 위험성이 낮다. 하지만 반고체 배터리는 2026년, 전고체 배터리는 2027년이 돼야 양산이 가능하다. 생산 초창기 가격이 높기 때문에 소비자가 구매할 수준으로 대중화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전까지 전기차 포비아를 극복하고 전기차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전기차 안전 관리 강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폐쇄 공간으로 여겨지는 지하 주차장에서 전기차 주차와 충전에 대한 공포를 줄여줘야 한다”며 “정부가 방화벽, 질식 소화포 등 소방시설 의무화와 같은 실질적인 대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영현 기자 nog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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