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정 누아르’ 다시 부름받아 여백의 연기 선보여…“저만 액션 연기 없어 편하면서도 좀 부러웠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좀 웃긴데요, 처음 박훈정 감독님께 ‘폭군’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땐 대중들이 ‘귀공자’에 이어서 제게 기시감을 느끼실 거란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었어요(웃음). 그냥 작품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니까 별 생각 없었는데 작품이 공개될 쯤에야 ‘나 왜 그걸(기시감을) 생각 안하고 연기했지?’ 싶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제가 맡은 인물이 다른 사람이니까 감독님께서 ‘귀공자’와는 100% 다르게 그려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큰 걱정이 없었죠(웃음).”
박훈정 감독의 첫 드라마 연출작 ‘폭군’은 한국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던 프로젝트 ‘폭군 프로그램’의 마지막 샘플이 배달사고로 사라진 뒤, 각기 다른 목적으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서로 쫓고 쫓기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추격 액션 스릴러다. 강화인간을 소재로 한 박훈정 감독의 영화 ‘마녀’ 시리즈의 스핀오프 격인 작품으로 김선호는 폭군 프로그램을 이용해 자신이 믿는 대의를 완성해 내려는 국정원의 강경파, 최 국장으로 분했다.
“국정원 국장을 연기하기엔 나이대가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제게 있어선 그 지점도 새로운 도전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아요. 어쩌겠어요, 아무래도 외형이나 소리, 성향을 타고난 배우들을 제가 이길 순 없잖아요(웃음).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내서 그 인물처럼 보이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엔 없었죠. 그러려면 우선 국장으로서 무게감을 줘야했어요. 제스처나 리액션을 많이 취한다면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서 움직임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죠. ‘최 국장은 이렇게까지 많이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 하면서요(웃음).”
그의 말대로 ‘폭군’의 최 국장은 대사를 통해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고 미묘한 몸짓이나 찰나의 표정으로 이를 짐작하도록 한다. 이제껏 김선호가 연기해 온 대부분의 인물들이 희로애락을 그대로 표현하며 대중들의 쉬운 접근을 허락해 온 반면, 의뭉스러움으로 명확한 차별점을 가져간 최 국장은 확실히 대중들에게도, 배우 본인에게도 낯설면서도 신선한 인물이다.
“저는 원래 어떤 액션이나 상황을 인지해서 대화하고, 제 연기로 의미를 부여하며 채워나가는 걸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대본에 적힌 것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했어요.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이 사람이 자극을 받고 있다는 걸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액팅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려고 했죠. 다른 이야기지만 극중에서 최 국장은 애연가인데요, 제가 담배를 못 펴서 한 3개월 정도 연습해야 했어요. 그리고 작품이 끝난 뒤엔 다행히도 잘 끊게 됐죠(웃음). 끊으려면 자꾸 생각나서 어렵다고들 하던데 저는 별로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아마 제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게 싫어서 그랬나 봐요(웃음).”
침묵으로 인한 무게감이 두드러져야 하는 캐릭터를 맡은 만큼 김선호에겐 액션 누아르를 표방한 ‘폭군’의 세 주연 가운데 유일하게 액션 신이 주어지지 않았다. 폭군 프로그램의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게 된 전직 요원이자 킬러인 임상을 연기한 차승원과, 탈취한 폭군 프로그램 혈청으로 ‘강화인간’이 된 금고기술자 채자경 역의 조윤수가 강도 높은 액션 신을 소화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는 김선호는 “혼자만 편해서 죄송하고 미안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폭군’의 백미야말로 이 둘의 액션 신이었다며 엄지를 치켜들기도 했다.
“제가 차승원 선배님과 조윤수 배우의 총기 액션을 기술시사 때 봤는데 보는 내내 정말 ‘우와!’했어요(웃음). 승원 선배님이 맡으신 임상이란 매력적인 캐릭터와 어린 윤수가 맡은 자경이가 함께 그 액션 신을 만들어나가는데 진짜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사실 저는 이번 작품에서 액션이 없어서 좀 죄송하고 미안하면서도 속으론 좀 편했나 싶긴 했는데요(웃음). 그 신을 보면서 두 분이 너무 부러웠어요. 정말 열심히 합을 맞춰야만 저런 멋진 액션이 나오는 거니까요.”
이처럼 액션 같은 ‘발산’이 아닌 ‘응축’으로 접근해야 했던 최 국장으로 있는 동안 김선호는 배우 인생 15년 만에 연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새로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간 해본 적 없었던 ‘여백의 연기’를 완성해 내고 나니 자신에게 있어 연기가 이전보다 더욱 ‘베프’(베스트 프렌드, 절친)처럼 느껴졌다고.
“요즘 들어 진짜 그런 ‘베프’같은 느낌을 받고 있어요. 너무 좋아서 매일 같이 놀고 싶다가도, 조금만 틀어지면 ‘안 봐!’ 하면서 한 이틀 연락 안 하다가 또 만나서 다시 잘 맞으면 ‘역시 넌 내 베프야!’ 하는 것처럼요(웃음). 연기가 너무 좋지만 제 한계를 마주할 때마다 고통스럽거든요. 어제도 촬영하는데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한 번만 다시 가볼게요’하면서 찍었어요. 이 베프가 자꾸 저를 등지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웃음). 그렇게 연달아 신이 안 풀리면 ‘난 재능이 없나봐’하고 자괴감에 빠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파구를 찾아서 해결하고, 그러다 대본을 잠깐 놓으면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그렇더라고요(웃음).”
그런 ‘베프’와의 관계를 평탄하게 유지하고자 한다면 결국 ‘잘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찰나의 안락함이 기나긴 식상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선호는 배우로서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두려운 도전’을 선택했다고 했다. 낯섦이 익숙함이 되기까지 짧든 길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면 애초에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솔직히 무서워요. 익숙했던 부분을 벗어난다는 건 어떤 배우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두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겠죠. 이번에 최 국장을 연기하면서 느낀 거지만, 뭐라도 방법을 찾아서 문을 두드려야만 여지와 가능성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니 무섭더라도 끝까지 도전해야 맞는 거겠죠. 누아르 작품을 연달아 찍었다고 해서 제가 그 장르를 잘 소화해냈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고 제 눈엔 단점만 보이지만요(웃음). 여기서 제가 잘했던 것을 다음 작품, 다음 장르에 가져간다면 그곳에서도 더 잘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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