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장-체육회장 겸직 금지되자 스포츠재단 만들어 지자체장이 운영…대한체육회 미온적 태도 비판 목소리
지자체가 스포츠재단을 설립한 뒤, 산하 체육회를 ‘패싱’하는 사례가 벌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지자체 체육회에선 상당한 우려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강원도에선 스포츠재단을 설립한 기초지자체의 경우 협회장기와 도 단위 대회 개최를 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가 나왔다. 그럼에도 기초지자체가 스포츠재단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기초지자체 체육회 관계자는 “2018년 국회에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이 가결됐다. 지자체장이 당연직 체육회장을 겸직할 수 없도록 법이 개정됐는데, 취지에 전혀 반하는 방향으로 지자체가 체육회 권한을 넘보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체육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트렌드를 거꾸로 주행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지자체 체육회장이 자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선출직’으로 바뀌면서 지자체장과 지자체 체육회장의 정치적 성향이 다른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탄탄한 지역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체육 관련 네트워크를 재선 도움닫기에 활용하는 꼼수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고 했다.
지자체장이 체육회장을 겸직할 수 없도록 국민체육진흥법이 개정된 배경에도 ‘정치적 이유’가 있다. 법이 개정되기 전 체육계에선 ‘메가톤급 이슈’가 터질 때마다 지자체 체육회를 둘러싼 각종 비위 의혹 등이 제기됐다. 당연직 체육회장이던 거물급 지자체장들이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연출됐다. 체육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했다.
스포츠재단 설립 불씨를 당긴 지자체는 강원도 양구군이었다. 2022년 9월 1일 강원도 양구군스포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이사장은 서흥원 양구군수가 맡았다. 조직도를 살펴보면 마케팅과 총무를 담당하는 부서, 지자체 산하 체육시설을 관리하는 부서 등이 존재했다. 통상 기초지자체 체육회에서 담당하는 업무다. 양구군에선 지자체장이 이사장을 맡은 스포츠재단이 시설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양구군스포츠재단이 출범한 뒤 한 달여가 지난 시점, 강원도 태백시에서도 스포츠재단 설립 청사진을 펼쳤다. 2022년 10월 이상호 태백시장은 양구군스포츠재단을 벤치마킹한 스포츠재단 설립 계획을 공식화했다. 스포츠재단이 대규모 전국대회 유치에 집중하고, 시체육회가 도 단위 대회유치 및 보조사업 등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구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충남 아산시의회에서는 시의원 연구단체 ‘아산시 스포츠재단 설립에 관한 연구모임’이 2024년 7월 4일 ‘스포츠재단 설립에 관한 연구용역’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사실상 스포츠재단 설립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한 행보로 풀이된다.
한 체육계 관계자는 기초지자체들이 자체적으로 스포츠재단 설립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이유와 관련해 “체육은 선거운동에 활용하기 가장 좋은 키워드”라면서 “조직이 지자체 구석구석에도 존재할 뿐 아니라, 체육 관련 자리도 많다. 지방재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스포츠재단을 통해 각종 대회를 유치하며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는 일종의 꼼수로 보고 있다”면서 “지자체 체육회장 자리가 직선제로 바뀌면서 지자체장과 체육회장 사이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이 스포츠재단 설립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자체장과 지자체 체육회장 정치성향이 다를 수 있는 이유와 관련해 이 관계자는 “교육감 선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면서 “예를 들어 A 진영에서 지자체장이 당선되면, 그 진영에서 선거운동을 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이 ‘적자’라고 주장하며 체육회장 선거에 쏟아져 나온다”면서 “지자체장을 배출한 진영에서 복수 후보가 나오면 표가 분리된다. 상대적으로 다른 진영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자체 체육회를 비롯한 지역 체육계 인사들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 취지에 반하는 스포츠재단 설립을 막지 못할 경우 대한민국 체육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체육계 관계자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에 달하는 실업팀 중에 70% 이상을 지자체 체육회가 관리하고 있다”면서 “각 지역별로 지자체 체육회 권한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당장 일선에서 선수들이 머무를 둥지가 많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결국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자체장의 체육회장 겸직을 취소했을 뿐 아니라, 스포츠재단 설립이라는 변종 수법까지 등장한 것”이라면서 “일선 시스템 개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지자체와 체육회가 알력다툼에 기력을 소모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선이 집중되는 광역지자체 체육회나 인구가 많은 대형 기초지자체의 경우엔 지자체장과 체육회장 정치 성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타협을 해나가는 어느 정도 공생모델이 자리 잡았다”면서도 “관심 사각지대에 있는 소규모 기초지자체 체육회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했다.
실제로 스포츠재단 설립 추진 과정에 있는 태백시의 경우, 태백시청과 태백시체육회 갈등이 점입가경 양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체육시설 운영을 체육회에게 맡길지, 지자체가 직영할지 여부를 두고 시청과 체육회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태백시청은 태백국민체육센터 관리위탁 운영 기간 만료를 근거로 2023년부터 태백시체육회에 ‘사무실을 빼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취재에 따르면 태백시체육회는 기존 사무실을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태백시청은 태백시체육회에 공유재산 무단점유에 대한 변상금이 부과될 예정이라고 통보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강원지역 체육계 관계자는 “양구에서 스포츠재단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고, 태백에서도 스포츠재단 설립 의지를 강력히 부각시키고 있다”면서 “당연직 체육회장을 할 수 없게 된 지자체장들이 이런 사례들을 응용하기 시작한다면, 지자체장과 정치적인 결이 다른 지자체 체육회들은 모두 말라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지자체발 스포츠재단 설립 움직임과 관련한 대한체육회 측 미온적 반응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한 지역 체육계 관계자는 “지자체 체육회들이 ‘패싱’당하는 것에 대해 대한체육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면서 “문체부가 대한체육회를 패싱하고, 예산교부를 직접하겠다고 하자 대한체육회는 즉각 반응했다”고 꼬집었다. 대한체육회가 내부 문제엔 적극적이면서 지역 체육에 대해선 소홀하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관계자는 “결국 지방 체육이 모여 대한 체육을 완성하는 것인데, 지방 체육이 처한 어려움은 지나치다가 본인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발끈하는 모양새”라면서 “대한체육회의 지방 체육 운영 정책도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지자체 체육회 사이에선 법률을 정비해 ‘꼼수’를 방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지자체 체육회 관계자는 “‘지자체 출자 출연 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 1항에서 지자체가 설립할 수 있는 주식회사, 재단법인 카테고리에서 체육을 제외한다든지, 국민체육진흥법을 개정해 스포츠재단이 설립되더라도 재단 이사장을 지자체장이 겸직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지자체 체육회 운영 가이드라인을 통일해서 내려줘, 지자체 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잘 운영될 수 있게끔 시스템을 정비하는 절차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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