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 별명 ‘제이크’ 화제…황성빈 스킵동작·김도영의 활약도 활력소
야구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치열한 순위 경쟁과 여성팬의 폭발적인 증가를 그 비결로 꼽는다. KIA 타이거즈(1위)와 LG 트윈스(3위) 등 리그 대표 인기 구단들이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고, 또 다른 인기 구단 롯데 자이언츠도 여전히 가을야구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11년을 뛴 류현진(한화 이글스)의 복귀와 김도영(KIA)·김택연(두산 베어스) 등 새로운 간판 스타들의 탄생도 야구 인기에 불을 붙였다.
또 10개 구단은 자체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경쟁적으로 다양한 비하인드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10~20대 젊은 팬덤의 발길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였다. MZ 세대들 사이에서 '야구장 관람 인증샷'과 유니폼 등 굿즈 구매, 각종 야구 관련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새로운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것도 흥행의 도화선이 됐다.
#뉴욕 타임스도 주목한 춤
올해 인터넷에서 유행한 수많은 야구 관련 밈들 중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영상은 1위 팀 KIA의 응원단이 만든 일명 '삐끼삐끼 춤'이다. KIA 치어리더들이 2022년부터 '삼진아웃송'과 함께 선보인 이 춤은 KIA 투수가 상대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 세웠을 때 상대 팀과 팬들을 약 올리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동작은 무척 단순하다. 쿵짝거리는 드럼 비트와 DJ의 스크래치가 만드는 '삐끼삐끼' 사운드에 맞춰 엄지손가락을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다 좌우로 방향을 바꿔 한 번 더 반복하면 된다. 활짝 웃거나 환호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춰야 이 춤의 매력과 효과가 극대화된다.
2년 전에 생겨난 이 춤이 올 시즌 갑자기 주목 받은 건 역시 KBO리그의 인기 때문이다. 특히 KIA의 스타 치어리더인 이주은 씨가 경기 중 자리에 앉아 화장을 고치다가 KIA 투수의 삼진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일어나 화장품을 손에 쥔 채 무심하게 춤을 추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큰 화제를 모으면서 더 입소문을 탔다. 글로벌 동영상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인 '틱톡'에서는 이 영상이 수백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해외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패러디 영상을 제작하면서 더 큰 붐이 일었다.
이 때문에 미국 유력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8월 28일 '틱톡을 뒤덮고 있는 이 한국 치어리더들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엄지손가락을 들고 추는 이 단순한 춤이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았다"며 '삐끼삐끼 춤'의 인기를 집중 조명했다. 이 매체는 "아주 여유로운 동작을 구사하는 야구 치어리더들의 영상이 SNS 알고리즘을 장악하고 시청자 수백만 명의 흥미를 끌고 있다"며 "최근 KBO리그의 관객 수가 역대 최다 규모로 늘어날 만큼 인기가 커지고 특히 젊은 여성 관객이 많아지면서 치어리더들의 인기도 높아졌다"고 짚었다. 또 "마치 곡예처럼 과격한 '칼군무'로 대표되는 미국 풋볼 치어리더들의 퍼포먼스와 달리 '삐끼삐끼 춤'을 추는 KIA 치어리더들의 모습은 마치 지루해 보일 만큼 절제돼 있다"고 비교하면서 "이런 매력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온라인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썼다.
뉴욕 타임스는 이 춤을 유행시킨 한국의 야구 관람 문화도 상세히 소개했다. "관객들은 객석에서 음식을 먹고 음악에 맞춰 일어나 춤을 추면서 야구를 즐긴다. 시즌 중에는 야구 티켓 가격도 저렴해 젊은 팬들이 즐기기에 좋다"고 전했다. 해외 KBO 팬 사이트를 운영하는 댄 커츠 씨는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KBO리그 경기는 미국의 메이저리그 경기에 비하면 마치 록 콘서트 같다"며 "한국 야구경기에서는 스코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팬들은 (결과에) 상관 없이 노래를 부르고 환호한다"고 증언했다.
#류현진이 왜 제이크야?
11년 만에 메이저리그를 떠나 친정팀 한화로 돌아온 류현진은 시즌 초반 한때 야구팬들에게 '제이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류현진에게 뜬금없이 영어 이름으로 된 밈이 생긴 이유는 한화의 한 팬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쓴 글 하나가 화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팬이 올린 게시물의 제목은 '류현진 이름을 지우고 제이크라는 이름을 대입해 봐'. 일부 야구팬이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류현진의 나이와 과거 수술 경력 등을 들어 복귀 후 성적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자 반박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다.
작성자는 '류현진' 대신 '제이크'라는 외국인 투수의 이름을 임의로 적은 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경력을 나열했다. '메이저리그 커리어 11년, 통산 78승 및 평균자책점 3.27. 올스타전 선발 투수 경험, 시즌(2019년) 평균자책점 1위, 사이영상 투표 2위와 3위, 누적 연봉 1600억 원, 지난 시즌 토미존 수술로 인한 재활 후 11경기 평균자책점 3.46 기록' 등이다. 이 팬은 "이런 (경력을 지닌) 제이크가 KBO에 오는데 타자들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니, 무슨 소리냐. 그냥 역대 최고 외국인 투수가 오는 셈"이라고 류현진을 향한 지지와 믿음을 표현했다. 류현진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한화는 사실상 외국인 투수 3명을 보유한 거나 다름없는 전력 상승 효과를 얻게 됐다는 의미였다. 그 후 이 글에 공감한 야구팬들이 류현진을 재미 삼아 '제이크'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별명 부자' 류현진은 또 다른 대표 별명 하나를 얻게 됐다.
#뛸까 말까, 마성의 황성빈
롯데 외야수 황성빈은 올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전국구 악동' 이미지를 얻었다. 황성빈 특유의 독특한 스킵 동작이 타 구단 선수들 사이에 밈으로 번지면서 야구팬들에게도 널리 전파된 것이다. 처음엔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비매너' 논란으로 화제가 됐고, 롯데를 제외한 9개 구단 팬들의 야유를 받았다.
발단이 된 '사건'은 3월 26일 광주 KIA전에서 벌어졌다. 1루에 대주자로 투입된 황성빈은 발을 땅에 붙여둔 채 2루 쪽으로 몸만 찔끔찔끔 움직이는 스킵 동작을 여러 차례 취했다. 마치 투수를 놀리는 듯한 '뛸까 말까' 동작이 거듭 반복되자 TV 중계진이 "테크노 댄스 같다"고 농담했을 정도다. 마운드에 있던 KIA 양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평소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가 황성빈 쪽을 뚫어지게 보며 기 싸움을 하기도 했다. 이후 황재균(KT 위즈), 구자욱(삼성 라이온즈) 등 다른 팀 선수들이 경기 도중 1루에서 당시 상황을 장난스럽게 흉내 내면서 패러디하는 장면도 수차례 나왔다. 그 정도로 황성빈의 스킵 동작이 독특했다는 의미다.
황성빈은 당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나를 보고 '열심히 안 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며 "그 이미지에 상대 팀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까지 생각하면 준비한 걸 못 하니 신경 안 쓰려고 한다"고 짐짓 당차게 말했다. 그러나 소속팀 롯데의 김태형 감독조차 "보는 내가 다 민망했다. 과도한 행동을 하면 상대 투수 입장에선 충분히 신경 쓰일 수 있다"며 조심스럽게 자제를 당부했다. 오히려 감정을 가라앉힌 양현종이 "황성빈의 그런 제스처가 순간적으로 의식이 되긴 했다. 사람인지라 표정에서 드러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게 그 선수의 임무이고 트레이드 마크 아닌가"라며 진화에 나섰을 정도다.
결국 황성빈은 4월 21일 KT와의 부산 더블헤더에서 하루에 홈런 3방을 터트린 뒤 "그동안의 일들로 사실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또 "고심 끝에 상대 팀 선수들께 오해를 사지 않게 내가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의도와 관계없이 상대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고개를 숙였다.
눈물과 함께 앙금을 털어낸 황성빈은 '뛸까 말까' 밈으로 인한 위기를 끝내 기회로 바꿨다. 7월 6일 열린 KBO 올스타전에서 이 밈을 활용한 회심의 퍼포먼스를 펼쳐 베스트 퍼포먼스상까지 수상했다. 기예르모 에레디아(SSG 랜더스)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대체 선수로 올스타전 막차를 탄 그는 이날 첫 타석에 앞서 '배달의 마황'이라는 문구가 적힌 헬멧을 쓰고 그라운드에 나타났다. 스킵 동작 논란 이후 생긴 '마성의 황성빈'이라는 별명을 문구에 이용했다. 이어 '딩동'이라는 배달 주문 알람에 맞춰 '배달의 민족'을 상징하는 민트색 전동 바이크에 탑승한 뒤 타석으로 향했다. 빠른 발을 앞세워 내야 안타를 만들어낸 그는 1루에 도착하자 다시 주머니에서 '배달 완료'라고 적힌 종이를 꺼내 팬들에게 들어 보였다. "주문하신 안타를 배달했다"는 의미였다.
하이라이트는 그 뒤에 나왔다. 황성빈은 승패에 큰 부담이 없는 올스타전에서 문제의 그 스킵 동작을 여러 차례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며 좌중을 웃겼다. 평소보다 더 빠르고 과한(?) 스킵 동작을 마치 안무처럼 반복하는 황성빈의 모습에 마운드에 있던 투수 김영규(NC 다이노스)와 포수 박동원(LG)조차 폭소를 터트렸다. 황성빈은 또 4회 초 수비에 앞서 '신속배달'이라 적힌 철가방을 달고 외야에 나타났다. 이어 팀 동료 박세웅이 마운드에서 손짓하자 진짜 신속하게 달려가 로진백을 배달했다. 수많은 선수가 야심 찬 퍼포먼스를 준비했지만, 논란을 정면돌파한 황성빈의 스토리 텔링을 이길 수는 없었다.
#KIA 팬들은 김도영 땀시 산다
올해 KBO리그 최고 스타는 누가 뭐래도 김도영(KIA)이다. 벌써부터 가장 유력한 정규시즌 최우수선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올 시즌 KBO리그 역대 9번째이자 국내 선수로는 24년 만에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내친 김에 역대 두 번째이자 국내 선수 최초의 40홈런-40도루 대기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43번째 시즌을 맞이한 KBO리그에서도 한 시즌에 40홈런과 40도루를 동시에 해낸 타자는 2015년 에릭 테임즈(47홈런-40도루·당시 NC)가 유일했다. 김도영은 9월 4일까지 35홈런-36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김도영의 기세라면 40-40도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이 때문에 올해 광주에선 "도영아, 니 땀시 살어야(도영아, 너 때문에 산다)"라는 응원 문구가 널리 유행했다. KIA 팬들은 이 문장을 다시 '도니살'이라고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처음 이 문구가 등장한 건 2023년 3월이었다. 광주의 한 팬이 '도영아, 니 땀시 살어야'라고 적은 스케치북을 들고 야구장에 왔는데, 이 문구가 TV 중계 화면에 잡혔다. 이후 김도영이 8월부터 이 장면을 캡처한 사진을 자신의 SNS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KIA 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김도영은 이후 프로필 사진을 다른 것으로 변경했다가 한창 맹활약하기 시작한 4월 9일 다시 문제의 '도니살' 사진을 내걸었다. 심지어 이날 4안타를 때려낸 뒤 인터뷰에선 "지난 시즌에 부진하다 그 프로필 사진을 설정한 뒤 자존감이 회복됐던 게 떠올라 다시 바꿔봤다"고 털어놔 감동을 안겼다.
그 후 계속된 김도영의 폭발적인 활약과 맞물려 이 문구는 KIA 팬들에게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 됐다. 결국 6월 30일에는 당시 그 팬이 야구장에 가져왔던 '도니살' 스케치북의 원본이 김도영에게 전달됐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김도영 역시 "팬 분들이 나 땜시 산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행복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며 '도니살'이라는 밈에 애정을 표현했다. 또 올스타전에서는 '도영이는 팬분들 땀시 살어야'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제작해 펼쳐 보였고, 아나운서의 특별한 포즈 요구에 "나 땀시 살겠제?"라며 윙크를 해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역대급' 선수가 만들어낸 '역대급' 밈의 파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도영은 7월 23일 광주 NC전에서 1회 내야안타, 3회 2루타, 5회 3루타, 6회 홈런을 차례로 때려내 KBO리그 역대 두 번째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한 경기에서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순서대로 쳐내는 것)를 달성했다. 이때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는 "KIA 타이거즈 팬들은 지금 누구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바로 김도영입니다!"라고 외쳤다. 또 8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에서 출시한 프로야구 송금 봉투 중 KIA 구단의 봉투에는 '니 땀시 살어야'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김도영과 '도니살'이 올해 1위 팀 KIA의 기세를 상징하는 밈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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