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층에 호소할 의제 마련 실패, 제3자 특검법 발목 잡아…용산과 차별화는 무리, 당내 우군 확보부터 나서야
#올라가려다 미끄덩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당대표 회담을 앞두고 한 대표 측은 ‘회담 전체 생중계’ 카드를 꺼내들었다. 민주당이 “여당 대표로서 자기 의제가 없어 ‘정치쇼’로 만들려 하는 것”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내자 한 대표는 “국민 여러분이 여야 대표가 대화하는 것을 보는 게 불쾌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한 대표의 생중계 제안을 놓고 ‘조선제일검’ 개인기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정치권에서는 풀이했다. 그의 장기인 언변으로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이재명 대표를 압박, 당 안팎에서 거론되는 비토 기류를 잠재우겠다는 전술이었다. 생중계는 비록 불발됐지만 한 대표의 자신감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그러나 9월 1일 회담에서 한 대표가 보여준 게 없었던 것은 물론,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구상에 말려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회담 결과 중 여권 지지자들에게 와 닿는 의제는 없었다. 오히려 용산이 껄끄러워하는 의대 정원 증원 문제가 당초 의제에서 빠져있었지만 논의 대상에 들어가 버렸다. 이재명 대표 주도로 꽤 오랜 시간 의대 정원 문제가 논의됐다고 한다. 비공개 회담에서 이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 사과나 책임자 문책, 대책 기구 구성 등을 요청했지만 한 대표는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한 대표의 약한 고리도 파고들었다. 한 대표가 제안했던 ‘제3자 추천 방식 특검법’에 대해 이 대표는 “한 대표 입장이 난처한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공당이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란, 자신이나 개인 또는 주변의 특별한 문제 때문에 국민적 대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너무 잘 알 것”이라며 3자 추천 방식 특검법 수용을 촉구했다. 여권 반발이 강력해 3자 추천 특검을 받기 어렵게 된 한 대표 처지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한 한 대표의 ‘곤란한 처지’는 양당 대변인끼리의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대표 회담에 배석했던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9월 2일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내가 처지가 좀 그렇다. 당내 상황이 좀 어렵다”는 한동훈 대표의 비공개 발언을 전했다. 조 수석대변인에 따르면 한 대표는 이 대표와의 회담 중에 “(채 해병 특검법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함없다. 나는 식언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한 대표가 채 해병 특검법에 여전히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당내 여건상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로 읽혔다. 조 수석대변인은 한 대표가 비공개 회담에서 “채 상병 특검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발언했다고도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국민의힘은 즉각 반박했다. 회담에 함께 배석했던 곽규택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9월 2일 “나는 전혀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힌 데 이어 정광재 국민의힘 대변인도 “한 대표가 ‘처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 대변인은 한 대표가 오히려 “특검법과 관련해 당내 일은 당이 알아서 하니 민주당이 시한을 정하는 식의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
어찌됐든 정치권 안팎에서 대표회담의 평가는 이재명 대표보다 한동훈 대표에게 훨씬 박하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9월 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재명 대표가) 한동훈 대표 만나서 ‘한 대표가 저렇게 말은 그냥 거침없이 하지만 실제로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라는 걸 확인시켜 주고 싶었는데 확인이 된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한동훈 대표가 당을 지금 장악도 못 했고 윤 대통령한테 좀 찍혀 있다’ 이걸 (이재명 대표가) 보여주려고 했고 ‘(한동훈 대표가) 내 라이벌이 아니다’라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정치초보 한 대표가 정치판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이 대표에게 회담 데뷔 무대에서 일단 패했다는 게 박 대표 해석이었다.
#불안한 당내 입지
양당 대표 회담에서 한 대표가 독자적인 카드를 제시하지 못했고 평소와 달리 자신감 있는 모습도 실종됐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은 현재 그의 당내 위치와 연결돼 있다는 게 여당 내부의 일관된 해석이다. 여러 차례 갈등을 빚은 바 있는 용산과 여전히 큰 거리감이 있는 데다 이 여파로 여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집권당 대표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없다.
무엇보다 한 대표 아킬레스건이 돼버린 ‘채 해병 특검법’만 해도 당내에서는 이를 밀어줄 우군이 거의 없다. 심지어 한 대표가 취임 후 친윤 세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과 가까운 정점식 의원을 밀어내고 자리를 맡긴 김상훈 정책위의장조차 채상병 특검법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 정책위의장은 9월 3일 YTN 라디오 ‘신율의 정면승부’에 나가 “제3자 특검법 이야기를 하더라도 입법화는 별개의 과정”이라며 “당내 의견 수렴 절차가 있어야 하고 정부와 사전 교감도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특검법이 우리 당내 동의를 받기 어렵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가 직접 임명한 정책위의장이 제3자 특검법에 대한 당내 여론이 좋지 않아 입법이 어려울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한 대표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발언이었다.
심지어 ‘한 대표 외톨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9월 3일 한 대표가 취임 후 첫 지역 행보로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경북의 구미를 찾았는데 구미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한 대표와 동행한 현역 의원은 대표 비서실장인 박정하 의원과 수석대변인인 한지아 의원, 한 대표 측근으로 꼽히는 고동진 의원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표를 할 때는 지역 방문 때 해당 지역 의원들은 물론, 옆 동네 의원들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한 대표의 구미 방문은 그렇지 않았다. 구미는 물론, 대구·경북(TK) 의원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민의힘 소속인 김장호 구미시장이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웃으면서 마무리되긴 했지만 이날 구미 방문에서는 한 대표 체면을 구기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 대표가 구미 방문 일정 중 국가산업단지 등을 찾아 반도체 산업 현장 간담회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말실수를 한 것이다. 현장 간담회에는 지난 4·10 총선에서 한 대표가 인재로 영입한 삼성전자 사장 출신 고동진 의원이 동석했다. 한 대표는 구미 반도체 특구 지원을 약속하면서 고 의원을 향해 “삼성의 반도체 산업이 출발한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닙니까”라며 동의를 구했다.
고 의원은 당황한 듯 “(경기 용인) 기흥…”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에 한 대표가 멋쩍게 웃으며 “휴대폰을 만들어내는 삼성이 한 단계 올라가는 데 있어 결국은 구미가 했던 역할이 (컸다)”고 말하자, 고 의원은 “아, 그건 절대적”이라고 답했다. 좌중에선 웃음이 터졌고, 끝나는 듯했지만 이를 두고 지역정가에선 뒷말이 나왔다. 보수의 심장이라는 TK를 잡기 위해 당대표 취임 이후 첫 방문지로 박정희 전 대통령 고향인 구미를 찾았는데, 사전 정보도 없이 왔다는 지적이다.
이 얘기를 뒤늦게 들었다는 TK 한 의원은 “한 대표가 구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갔을 것인데 이런 말실수가 나온 것은 한 대표를 뒷받침하는 힘이 지금 굉장히 약하다는 증거”라며 “의원들이 앞 다퉈 구미에 대해, 반도체에 대해 얘기해줬으면 똑똑한 걸로 따지면 별로 견줄 사람이 없는 한 대표가 이런 엉뚱한 얘기를 할 까닭이 없다”라고 했다.
#일단 세부터 키워야
여당 내부에서는 한 대표를 향해 “아직 멀었다. 많이 배워야 한다”는 조언들이 봇물을 이룬다. 초고속 승진을 통해 일찌감치 검사장을 한 경력에다 법무부 장관과 여당 비대위원장 이력까지 있는데 지금은 화려한 과거를 깔끔하게 잊고 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우선 용산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훈수가 거론된다. 당내 세력이 부족한데, 용산과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무리라는 것이다. 7·23 전당대회 때 한 대표와 겨뤘던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9월 5일 더불어민주당이 ‘제3자 주도’ 방식이 포함된 채 해병 특검법을 발의한 것과 관련 “(야당에) 빌미만 주게 됐다”고 꼬집었다. 정치 생리를 잘 모르는 한 대표가 용산과의 차별화를 위해 덜컥 특검을 던졌다가 자신은 물론, 당에도 큰 부담을 지우게 됐다는 취지였다.
정치적 상황을 잘 읽어야 한다는 제언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세 확장에 대한 보다 적극적 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 당헌·당규상 한 대표가 다음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내년 9월 대표직을 사퇴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불과 1년 남짓 남았다. 그런데 이 기간 당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하는 선거는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한 대표에 대한 여당 현역 의원들의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다수 여당 의원들의 목소리다. 국민의힘 한 전직 중진 의원은 이렇게 충고했다.
“한 대표는 용산과 사이가 좋지 않고 등을 졌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의원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지고 의원들도 한 대표를 멀리하게 된다. 이렇게 돼서는 당 장악이 되지 않고 당대표가 겉돌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을 바꿔야 하고 흐트러진 얼굴을 보이고서라도 의원들에게 바짝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참을 인(忍)자를 크게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나가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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