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탄발언으로 큰 파란을 일으켰던 정대철 민주 당 대표가 ‘주말 호흡 고르기’를 끝낸 지난 14일 입을 굳게 다문 채 민주당사를 나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민주당 정대철 대표가 구속된 윤창렬 굿모닝시티 대표로부터 4억2천만원을 수수한 내역을 밝히는 과정에서 ‘판도라의 상자’인 16대 대선자금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 집권당 대표가 비리 혐의로 검찰의 소환요구를 받은 것도 전례가 없는데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여권 핵심부에 대한 ‘협박’으로 비쳐질 행동을 하는 것도 극히 비정상적인 사례다.
특히 정 대표가 대선자금을 거론하기 전날인 10일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독대를 가진 것과 관련, 여권내에서는 “정 대표의 거취 문제와 관련해 두 사람간 담판이 결렬되는 바람에 정 대표가 대선자금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분석이 나돌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일각에서는 이미 김대중 정권 초기 경성 사건으로 구속된 전력을 갖고 있는 정 대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청와대와 ‘모종의 딜(Deal)’을 추진중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 대표가 굿모닝시티측으로부터 청탁 대가로 거액을 수수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지난 10일. 정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고위 당직자회의에서 “윤씨로부터 받은 돈은 4억원이 아니라 2억원이며 대선 후원금으로 받은 것”이라며 “후원금을 받을 당시 당직자의 소개를 받고 변호사를 대동해 괜찮은 돈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에서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도 태연히 덧붙였다.
정 대표는 또 이날 오후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노 대통령과 30여분간 독대를 가진 후 만찬을 함께한 후 청와대를 나서면서 한 측근에게 전화로 “내일(11일) 의원총회에서 발언할 원고를 준비하라”고 지시, 민주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과 얘기가 잘된 모양”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11일 정 대표가 내뱉은 발언은 예상과 달리 한마디 한마디가 메가톤급 파장을 불러일으킬 내용이었다. ‘1탄’은 오전 9시30분께 의원총회 모두에 이뤄진 신상발언.
정 대표는 “지난해 대표 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 집에서 2억원을 받아, 당시 내 선거캠프의 선대본부장이던 박정훈 전 의원에게 직접 전달했고, 정영석 보좌관에게 영수증 처리를 부탁했는데 알아보니 영수증이 발급되지 않았더라”고 밝혔다.
지난 한해 정 대표가 윤씨로부터 받은 돈이 4억1천만원에 달해 법인 기부한도(2억5천만원)를 넘어섰고 정식으로 후원회를 통해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등 불법을 자인한 셈. 느닷없는 경선자금 내역 공개에 의총장은 술렁였고 정 대표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는 당과 동지와 깊이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2탄’이 터진 것은 낮 12시20분께.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정 대표는 “지난 대선 당시 총무본부장인 이상수 사무총장에게 ‘토스’(toss)한 돈이 10억원 정도 된다”고 말해 기자들의 귀를 의심케 만들었다. 대선자금에 대한 정 대표의 ‘시리즈성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정 대표는 마지막으로 오후 5시께 다시 기자들에게 “대선 때 당이 받은 돈이 돼지저금통을 빼고도 2백억원이 된다”는 ‘폭탄선언’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 과정에서 정 대표는 “지난 1월 이 총장 보고 때 대선잔금이 40억원쯤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최근 확인해 보니 10억원인가밖에 안된다고 하더라”고 말해 뭔가 단단히 작심하고 의혹을 증폭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나중에 이 총장이 정 대표의 발언과 관련, “뭔가 착각한 것 같다”며 구체적 내역을 설명하자 뒤늦게 “우리 당 이정일 의원으로부터 빌린 50억원을 오해해 2백억원이라고 말한 것 같다”고 번복했지만 정 대표의 이날 행보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 노무현 대통령과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17일 청와 대에서 회동을 갖고 정국 현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 대사진기자단 | ||
정 대표측은 특히 굿모닝시티건과 관련해 신주류 핵심인 K, S의원 등과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의 연루설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유독 정 대표에 대해서만 옥죄어 오는 데 대해 경계심을 나타내 왔다.
정 대표의 한 측근은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두 달여 전부터 신주류 핵심 K의원측이 정 대표의 후원금 내역을 거론하며 ‘문제가 있다’고 흘리고 다닐 때부터 이상했다. 그후 6월 하순 들어 굿모닝시티 정치권 로비설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유독 정 대표만이 실명이 박힌 채 신문과 방송에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청탁성 뇌물’ 운운하는 상황이 왔다.
명색이 집권당 대표인데 어떤 저의가 있지 않는 한 검찰이 이처럼 내놓고 흔들기를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여권 내에 정 대표를 굿모닝시티 로비건과 관련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라 하겠다.
실제 정 대표는 14일 ‘대표직 사퇴 거부, 검찰 소환 불응’이란 강경대응 방침을 결정하기 전 김원기 고문, 이상수 사무총장 등과의 회동(11일 밤),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유인태 정무수석과의 심야 회동(13일 밤)에서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검찰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며 배경에 의구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는 회동 전후 측근들에게 “대선 때 있었던 일을 내가 다 아는데, 왜 나만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토로했으며 측근들도 “검찰 수사 내용을 다 알고 있던 청와대가 이 같은 사실을 통보조차 제대로 안해줬고, 검찰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정대철 버리기’라는 음모설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시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 대표측이 제기한 ‘음모론’에 대해 청와대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정 대표측의 ‘과민 반응’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무라인의 한 핵심관계자는 “(음모가) 있을리도 없지만 정 대표가 그렇게 여긴다면 한마디로 단단히 오해한 것이다. 검찰 수사와 관련해 여러 억울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집권당 대표라는 분이 ‘배후’ ‘음모’ 운운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시했다.
이 관계자는 “민정수석실에서 수사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 정부 출범 후 ‘ABC’가 된 것 아니냐”며 “요즘 정 대표가 신당 문제를 푸느라 구주류 인사들하고 자주 어울리더니 ‘음모론’을 제기하는 버릇까지 배워온 것 아니냐”고까지 힐난했다.
여권 내에서는 이미 ‘10억원 토스설’ ‘대선자금 2백억원 모금설’ 등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정 대표가 검찰의 압박에 따라 ‘추가 폭로’에 나설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정 대표가 검찰소환 불응이라는 초강경 입장을 밝히고 검찰 역시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며 맞서고 있어 상황에 따라서는 여권 내에서 엄청난 파열음을 내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다.
특히 정 대표로서는 검찰이 자신의 ‘대가성 없는 후원금’ 주장 대신 ‘알선수재’ 쪽으로 몰아갈 경우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를 재차 공격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