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서울시가 6개월 조사 끝에 '문제없음'으로 사안을 종결하며 유족 분노가 거세다. 조사 초부터 절차와 방법을 놓고 문제 제기가 잇따른 터였다. 사건이 대인관계에서 비롯된 '따돌림' 문제였으나, 서울시가 '물적 증거'에 집착하거나 행정력 한계 등을 이유로 지지부진하던 조사를 급하게 끝냈다는 게 핵심이다.
조사관들의 미흡한 인권감수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인권담당관이 해오던 직장괴롭힘 조사를 감사 부서로 넘기면서 발생한 제도적 허점이란 지적도 나온다.
#"도저히 회사를 갈 수가 없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식물원에서 공중화장실과 시설물 청소 등을 해온 공무직 60대 여성 A 씨가 올 4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는 유서에서 "도저히 회사를 갈 수가 없다"며 직장괴롭힘 피해를 호소했다.
A 씨는 △건강이 악화한 사정을 알고도 협의 없이 근무 일정을 짜고 힘든 곳에 배치 △함께 일하기 곤란한 짝꿍 연속 배치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동료들을 집합시켜 곤경에 처함 등 피해를 토로했다.
불합리한 업무 형태 일부를 거론했지만 실은 따돌림이 가장 큰 문제였다. A 씨는 평소에도 자주 고통을 내비쳤다. 그가 지인·가족 등과 나눈 카카오톡에는 '나만 에코카를 안 태워준다' '내가 다가가면 하던 말들을 멈춘다' '용기 내 같이 밥 먹자고 제안했는데 거절당해 속상하다'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나마 A 씨와 가까웠던 한 동료는 장례식장에 찾아와 "몇몇이 편가르기를 주도해 A 씨가 소외감과 자존심 상처가 컸었다"고 증언했다.
A 씨는 약 2000자 분량의 꽤 긴 유서를 남겼다. 다만 평소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표현 방식이 그리 유려하거나 체계적이진 못했다. 따라서 조사기관이 어느 때보다도 피해자 입장을 세심히 헤아리고 사안을 엄중히 들여다보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고용노동부 매뉴얼에 따르면 직장괴롭힘은 '따돌림' '개인사 뒷담화' 등 정서를 괴롭게 만드는 행위도 포함한다.
#접수는 간신히, 조사는 깜깜이
그러나 현실에서 유족들은 6개월째 아픔만 더했다. 서울식물원이나 서울시가 진상을 조사해 왕따 주동자와 가담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서주길 바랐다. 하지만 실상은 서로 일을 미루거나 소극 대처하는 인상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맨처음 서울식물원에 사안을 알리고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자 "직장괴롭힘 관련은 서울시에 접수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동부 직장괴롭힘 사건처리 지침은 '사용자의 조사·조치 의무'를 명시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유족들은 올 5월 서울시로 향했다. 그렇지만 이곳 반응도 상식과 크게 달랐다. 서울시 관계자는 "노동청에 접수하는 방안도 있다" "서울식물원에서 저희한테 먼저 안내를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등 어쩐지 상황을 기피하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가 자칫 책임을 떠안게 될까 부담을 느끼는 모습도 보였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 말이다.
(노동부) 근로감독관이 서울식물원에 시정명령을 안 한다면, 저희 쪽에 시정명령을 하라고 해요. 그런데 저희는 아무 것도 몰랐던 상황이잖아요. 저희한테 이런 부분들을 처리 안 했다며 압력을 넣을 수가 있는 상황이에요.A 씨 사건은 일단 접수됐다. 단, 마지못해 이뤄진 분위기였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유족들은 서울시 측이 에둘러 타 기관 접수를 유도하는 듯한 느낌에 '큰 기대는 갖기 어렵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서울시 관계자 말이다.
만약 저희에(서울시) 조사할 사람이 없으면 서울식물원한테 외부 노무법인에 알아보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결과가 미비하면, 신고인께서 서울식물원 쪽에다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게 그래도 실질적 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요.이처럼 조사가 이뤄질지만으로 유족들이 불안을 가중한 데에는 2023년 서울시가 직장괴롭힘 매뉴얼을 개정한 영향이 컸다. 이른바 '오세훈표 서울시 직장괴롭힘 매뉴얼'로 불린 이 개정 방침은 "신고 내용이 직장괴롭힘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를 각하 사유로 정했다. 담당자 임의로 조사를 안 할 수도 있는 구조다.
A 씨 사건은 조사 방식도 석연치 않았다. 특정인을 인간관계에서 교묘히 배제하는 따돌림 행위의 실체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업무배치가 정말 불합리했는지' 등 규정 위반 여부를 살피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예컨대 '에코카는 탔다더라' 등 지엽적인 사항을 들어 유족 측에 추가 증거를 거듭 요청하는 식이었다.
불투명한 절차도 큰 문제였다. 서울시는 "왕따는 없었던 것 같다"는 입장을 전하면서도 정작 조사 대상과 방식은 비공개했다. 유족들은 서울시가 어떤 사유로 이같이 판단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유족을 돕고 있는 배현진 노무사(노무법인 인사이트)는 "왕따 양상이 다른 경우보다 사실 확인이 어렵긴 하지만 이번 사건은 피해자와 유족 진술이 일관됐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서와 카톡 등 정황 자료도 비교적 많은 편"이라며 "그런데도 서울시는 서울식물원에서 발견되는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 식의 말만 반복했다"고 지적했다.
#"인권 쪽 위원 없다"
서울식물원 쪽 진술은 조사 명목으로 다 기록하면서, 저희가(유족들) 증언하는 건 면담이라 기록도 안 남기잖아요. 이래놓고 사용자 쪽의 '우린 왕따 시킨 적 없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있고,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은 신빙성이 없다는 말입니까.유족 측은 최근 서울시와 면담에서 이렇게 항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서울시는 유족들에 행정력 한계와 현실적 문제를 털어놓았다. 서울식물원에서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윗선에 보고를 하기도 난감하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 말이다.
행정조사라는 게 뭘 강압적으로 할 수는 없고 (중략) 저희 조사담당자들이 윗선에다 '가서 봤더니 뭔가 있을 것 같다'고 보고하면, 저희도 멋쩍어지죠. 우리 건물(서울시청 청사) 안에만 변호사도 있고 검찰 출신 외부위원도 있고 그래요.유족들이 가해자로 꼽는 모 상급자의 문제를 거론하자, '힘들긴 그분(가해자 지목)도 마찬가지'라는 식의 납득하기 힘든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A 씨 사건은 이런 양상이 되풀이되며 서울시 조사관들의 결여된 인권감수성을 놓고도 수차례 말이 오갔다.
이 역시 서울시의 매뉴얼 개정이 원인으로 꼽힌다. 이전까지 서울시의 직장괴롭힘 사건은 '인권담당관'이 접수부터 조사까지 한 번에 맡아 왔다. 그러다 2023년부터 노동정책관이 접수를 맡고, '감사위원회'가 조사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런 탓에 사안 조사 방식도 통상적인 감사처럼 법이나 규정 위반이 없는지 등을 주로 들여다보게 됐다. 인권적 요소를 고려해 직장 내 특정인을 소외하는 분위기나 움직임이 있진 않았을지 등까지 고려하는 작업은 뒷전이 됐다. 피해자를 응대하는 태도나 관련 전문성도 마찬가지다.
실제 서울시 관계자도 인권 측면은 주요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직접 발언했다.
저희 직장 내 괴롭힘 업무가 인권담당관 카테고리였어요. 그 인권위원회처럼 약간 인권 위주로 하다가, 감사 부서로 넘어왔어요. 그래서 범죄 행위 수사처럼 증거 위주로 하게 되고요…(중략) 감사위원회가 일단 있으니까, 감사위원회 변호사님들이나 회계사 분들이나 이런 분들 계시죠. 인권 쪽 위원들은 아니에요.#조사 연장해 놓고 '무혐의' 결론…갑자기?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 10월 7일 일요신문에 "오는 11월까지 조사를 연장했다"며 "최대한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10월 8일 A 씨 사건을 '직장괴롭힘으로 보기 힘들다'고 결론지었다. 공교롭게도 서울시는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단 하루 만에 이같이 조치를 내렸다. 최근 유족 측에 조사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해 오는 11월 28일까지 이어가겠다고 통지했지만, 한 달도 더 남은 시점에 돌연 결과를 앞당긴 것이다.
배현진 노무사는 10월 10일 "저와 유족들은 아직 아무런 통지를 받지 못했다"며 당혹감을 내비쳤다. 이어 "피해자의 피해 감정은 일체 배제하고 행정조사 형태로만 괴롭힘을 조사한다면 괴롭힘 사건 규명은 요원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노동청 진정 등을 통해 그간의 문제와 결과를 바로 잡는 데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한 유족은 일요신문에 "무려 6개월가량 '가해자들은 그런 적 없다더라' '가해자도 힘들어 하더라'는 말만 반복해 들어 왔다"며 "이런 실태라면 서울시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괴롭힘 피해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서울식물원 관계자는 "A 씨 대상 면담 등은 진행한 적 없다"면서도 "매일 아침 업무 시작 전 조회를 통해 근로자 상태를 파악하고, 직장괴롭힘 예방 교육도 실시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단 서울시로부터 문제없음 통보를 받았다"며 "그 외 구체적 내용은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밝히기 힘들다"고 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