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침투 발끈, ‘지뢰 매설+도로 폭파’로 농성 본격화…“적대적 두 국가론 일환, 공격군 지위 포기한 셈”
북한은 2024년 들어 친러시아 노선을 선택했다. 동시에 선대 때부터 이어온 통일 노선을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로 알아서 잘 살자’는 식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웠다. 5월부터 북한은 신개념 도발을 감행했다. 쓰레기 풍선을 남쪽으로 띄워 보내는 방식이었다(관련기사 오물 풍선 날리고 전방 지뢰 매설…지금 북한에선 무슨 일이?).
쓰레기 풍선과 관련해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우리 인민 표현의 자유”라면서 “성의를 선물로 여기고 계속 계속 주워 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탈북민 단체 등 민간단체가 북을 향해 살포한 대북전단에 대한 대응 조치로 풀이됐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선전선동 전략이 21세기 들어 전혀 먹히지 않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지적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선전선동 전략이 먹히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남북간) 군사적 기술 차이도 상당히 벌어졌다”면서 “군사적으로 맞부딪히지 않으면서 우리나라를 귀찮게 할 수 있는 전략으로 쓰레기 풍선 카드를 꺼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북한이 도발 카드를 상당부분 소진했으며, 정말 막다른 길에서 ‘막장 카드’를 꺼낸 셈”이라고 덧붙였다.
여기다 북한군은 2024년 연초부터 남북 국경지대에 지뢰를 매설하기 시작했다. 복수 대북 소식통은 남북 군사분계선 인근에 방벽을 쌓은 뒤 지뢰를 매설한 조치를 북한의 농성전 시작점으로 봤다. 한 대북 소식통은 “지뢰를 매설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지뢰를 해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면서 “북한이 남북 군사분계선에 지뢰를 매설하고 있는 건 스스로 ‘공격군’의 포지션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10월 11일 북한은 다시 한 번 발끈했다. 북한 외무성은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 중대성명을 통해 “한국은 10월 3일, 10월 9일에 이어 10월 10일에도 심야 시간을 노려 무인기를 평양 중구역 상공에 침범시켜 수많은 반공화국 정치모략 선동 삐라(대북전단)를 살포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했다”고 밝혔다. 외무성 성명 발표 1시간 뒤 북한은 다시 쓰레기 풍선을 부양했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10월 1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평양 상공 무인기 삐라 살포 여부에 대해 “우리의 기본적 입장은 북한 주장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무인기 침투 주장과 관련해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10월 13일 KBS ‘일요진단’ 인터뷰에서 “흔들리고 있는 내부 통제를 위해 긴장을 고조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상공에 무인기가 침투해 삐라를 살포한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가 많다. 군 당국이 직접 무인기를 보냈는지, 민간 차원에서 무인기를 날린 것인지 여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10월 13일 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가 국경선 부근 8개 포병여단에 사격대기태세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북한 군 당국은 한국발 무인기 추가도발 가능성과 무력충돌 확대 가능성을 시사했다. 포병여단 준비태세 최우선 목표가 무인기 격추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한국 군 당국이 무인기를 평양에 보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고 있지만, 북한 내부에서 무인기에 대해 상당히 당황한 흔적을 내비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무인기에 북한 상공이 뚫렸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삐라를 뿌리는 무인기가 평양 상공 한가운데 출현한 것은 북한 군 당국의 공포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사안”이라면서 “무인기가 삐라가 아니라 다른 것을 싣고 왔어도 대처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이야기와 같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쓰레기 풍선을 부양할 때 한국에서 ‘쓰레기가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있다면 큰일 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북한 측이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이번에 살포된 대북전단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스위스제 명품 시계를 착용한 사진과 프랑스 명품기업 크리스찬 디올 패딩을 입은 사진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자이크 된 문구는 ‘자기 배 불리기에 여념 없는 김정은’과 같은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은 무인기 삐라 살포를 빌미로 대남 적개심을 고조시키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김정은이 ‘북한판 국가안전보장회의’에 해당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가 소집된 이후 북한군은 ‘남북 평화 상징’과도 같은 남북 연결 도로인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도로를 폭파했다. 폭파 당시 흙이 하늘 높이 솟구치는 장면이 연출됐다. 군사분계선과 약 10m 떨어진 지점이었다.
북한이 TNT를 매설한 뒤 폭약을 흙으로 덮었고, TNT 폭발 과정서 흙이 높게 튀어오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도로를 폭파하는 일련의 과정서 시각적인 효과를 두드러지게 설계하며 ‘폭파 쇼’를 한 것”이라면서 “휴전선 코앞에서 이뤄진 폭파 쇼를 통해 통일 불가론에 대한 협상 여지가 없음을 피력한 셈”이라고 바라봤다.
경의선 도로 폭파 과정엔 김정은이 직접 참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로 폭파 직전 김정은이 탑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렉서스 차량이 현장 감시장비에 포착됐다. 이 렉서스 차량은 7월 북한 홍수 피해 현장 방문 당시 탑승했던 차량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북한이 폭파한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사업에 우리 정부가 투입한 예산은 약 1800억 원 규모로 파악된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투입된 예산이다. 폭파된 경의선 남북 연결도로의 경우엔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 당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히스토리를 품고 있는 도로이기도 하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이번에 북한이 도로를 폭파한 것은 무인기 삐라 살포에 따른 도발 혹은 화풀이로 보일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도로를 폭파한 것 자체는 북한의 두 국가론과 농성전을 심화하는 조치”라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지뢰를 매설한 데다 도로까지 폭파했다는 것은 한국군이 올라올 수 있는 길을 모두 차단한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북한이 지뢰 매설에 이어 도로 폭파로 공격군의 지위를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 체제 유지를 강력하게 위협할 수 있는 심리전 수단인 삐라 살포가 북한 심장부인 평양까지 닿았음에도, 북한이 무력도발이 아닌 ‘자해성 도발’을 감행하며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의지를 피력했다”면서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향후 남북 간 긴장이 얼마만큼 고조될지 여부는 북한이 쓰레기 풍선 도발을 지속할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창권 탈북민연합회 회장은 “북한이 무인기 대북전단에 상당히 분노하고 있는데, 이를 북한의 자작극으로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북한이 분노심을 표출하며 김정은 일가를 모욕하는 대북전단을 공개했는데, 북한에서 아무리 기상천외한 도발을 기획하더라도 ‘최고지도자’를 모욕하는 수준 고육책을 활용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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