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4년 만에 첫 주연 맡아…“아역배우 싱크로율 저도 놀라, 어디서 데려왔나 했죠”
“얼굴이 낯설다고 봐주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더라고요. 감사했죠(웃음). 사실 낯선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제가 연기한 종려는 촘촘하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어서 그가 어떤 마음일지 고민하다 보니 그런 얼굴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이렇게 남자다운, 요즘엔 좀 별로인 워딩이지만(웃음), 그렇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어서 연기가 좀 더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고요.”
영화 ‘전, 란’ 에서 박정민이 연기한 이종려는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로 어릴 적 몸종으로 들인 노비 천영(강동원 분)과 신분을 넘어선 우정을 나눈다.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에도 몸종인 천영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며 불손한 태도를 보여도 친구로서 받아들이고 언젠가 그가 노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반상의 구별이 분명한 아버지를 정면으로 들이받을 용기는 없고, 천것을 천것대로 대우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아내의 말에도 선뜻 반박하지 못한다. 이상에만 그칠 뿐인 그의 공허한 말을 과연 진정한 ‘우정’으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박정민 역시 많은 생각을 해봤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으니까요. 아마 분명히 천영에게 주었던 종려의 마음, 그리고 그와 나눈 우정은 진심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사건들이 계속 겹치면서 보이는 종려의 모습은 그가 여지없이 양반이고, 계급인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죠. 또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야 제게도 종려의 마음들이 설명되더라고요. 종려는 결국, 어쩔 수 없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거든요. 정말 천영이 좋아서 이름을 지어줬지만 그마저도 ‘너는 내 그림자’라고 말하잖아요? 그 안에 이 사람의 양가적인 마음이 다 담겨있고, 그걸 바탕으로 관계 성립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신분 차의 흔적이 남은 우정을 얼기설기 이어가지만 종려와 천영의 관계는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결국 산산이 무너진다. 종려 집안의 종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인 가족을 모두 살육하고, 겨우 살아 남은 종려의 아내는 자신을 구하려 한 천영의 손을 이들과 같은 ‘천것’이라며 거부해 어린 외동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망연자실해 다른 종들이 이미 도망친 곳에 홀로 남아있던 천영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종려의 갈 곳 없는 분노를 온전히 맞게 된다. 오해로 어그러진 우정이 각자의 칼끝으로 이어지며 전쟁 7년 만에야 맞닿게 된 이 둘의 처절한 대결은 ‘전, 란’의 화려한 액션 신 가운데에서도 단연 백미로 꼽혔다.
“이전의 종려는 천영과의 검술 실력 차에 확실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천영에게 아예 미치지 못했지만, 7년간 왕을 호위하고 군대를 이끌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을 거예요. 이 포인트가 다시 천영을 만나서 싸울 때 대등한 느낌을 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실력적으로는 천영에게 당연히 뒤처지는 게 맞지만 종려의 칼질에는 ‘울분’이 있었던 거죠. 그런 감정이 실린 칼의 움직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액션을 준비했어요.”
이처럼 ‘전, 란’은 어긋나서 더욱 처절했던 종려와 천영의 우정을 이야기의 큰 줄기로 삼고 있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서 박정민과 강동원 두 배우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둘이 동시에 나오는 장면은 초반과 후반에 그치고, 나머지 시간 동안 천영은 농민군과, 종려는 선조를 호위하는 무관들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박정민은 강동원에게 함께한 시간 이상으로 깊은 친밀감을 혼자 느끼고 있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저 사람이 제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강동원 선배님이 되게 편했어요. 만일 어려운 선배님이었다면 제가 촬영이 먼저 끝나도 그곳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게 되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강동원 선배님은 제가 그냥 쓱 가도 저를 안 미워하실 것 같은 편안함이 있더라고요(웃음). 눈치를 보지 않게 해주시는 호의와 호감들이 쌓여가니까 너무 좋았어요. 제가 골프를 쳤다면 선배님과 더 친해졌을 수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점은 좀 아쉽네요(웃음).”
초반부 서사 흡인의 중심에 서 있던 종려와 천영의 아역을 맡은 배우들에게도 극찬을 이어갔다. 특히 종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역 배우 이윤상은 “진짜 박정민 아들을 데려온 게 아니냐”는 대중들의 농담 반 진담 반 ‘경악’을 이끌어 내며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한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를 연기하는 아역과 성인역 배우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아역 배우 얼굴에 CG(컴퓨터 그래픽) 처리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엔 100% 자연 그대로의 ‘리틀 박정민’이었다는 게 박정민의 이야기다.
“천영이 아역의 경우는 제가 찍었던 단편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예요. 너무 반가워서 정말 편하고 친하게 지냈죠. 그리고 종려의 아역 배우는 애가 정말 모진 데가, 구김살이 하나도 없는 정말 순수한 아이죠(웃음). 맨날 사인해 달라고 그러고 사진 찍자고 그러고 정말 너무 귀여웠어요. 그런데 가끔씩 볼 때마다 저랑 너무 닮았으니까 혼자서 ‘얘를 어디서 데리고 왔지?’ 이러고 있었죠(웃음). 영화로 보니까 더 닮아서 사람들이 왜 AI로 만들었거나 CG 처리한 게 아니냐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런 처리 하나도 안 된 얼굴인데(웃음).”
공개되고 나서는 이처럼 아역과 성인 배우의 100% 싱크로율과 두 주연 배우의 화려한 액션 신에 더해진 폭발적인 감정 연기 등이 호평을 받았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전, 란’을 두고는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었다. 무엇보다 10월 11일 폐막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꼽힌 지점이 가장 큰 이야깃거리였다. OTT 플랫폼 대표주자인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영화가 영화제의 시작을 장식한다는 점이, 달리 말하자면 ‘스크린 시대’ 의 종말과도 겹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펼쳐내는 장이 스크린이냐, TV 또는 스마트폰이냐에 그 작품의 가치가 달려있지 않다고 해도 이 문제가 한시적이나마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였음은 확실했다. 주연 배우이자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박정민의 결론은 심플하게도 ‘그럴 수 있지’로 정리됐다.
“저는 제가 나오지 않은 넷플릭스 영화가 부국제 개막작으로 선정됐어도 ‘그럴 수 있지’ 하면서 아무 생각 없었을 거예요. 그러다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중요한 사안이란 걸 인지했죠. 다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OTT 플랫폼이 일상에 많이 스며들어 있는 와중에 OTT와 극장의 우열을 따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두 매체를 다 즐기는 소비자로서 저는 별로 상관하지 않거든요. 넷플릭스 영화에 어떤 편견이 있다고 한들 그건 개개인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도 우리 영화를 부국제 스크린으로 처음 보면서 ‘모니터로 보기엔 좀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부국제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거든요. 아마 이렇게 말하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더라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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