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 명창들 찾아다니며 3년간 판소리 연습…드라마화 과정서 원작 ‘퀴어 코드’는 배제
뜨거운 반응은 시청률로 증명된다. 10월 12일 방송을 시작한 ‘정년이’는 단 4회 만에 시청률 12.7%(닐슨코리아·전국기준)를 기록했다. 첫 회 시청률인 4.8%에서 약 3배 가까이 급등했다. 이로써 ‘정년이’가 안방극장의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인기의 진원지는 타이틀롤 김태리다. 정년이 그 자체가 된 듯한 흡입력 강한 연기로 극을 이끌면서 시청자를 당대 국극의 세계로 빨려들게 한다.
#김태리는 어떻게 ‘정년이’가 됐나
김태리는 ‘정년이’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도록 이끈 일등공신이다. 드라마는 동명의 웹툰이 원작이다. 한국전쟁 직후 너나없이 먹고살기 힘든 시기를 배경으로 판소리와 연기를 결합한 장르인 국극의 세계에 뛰어들어 최고의 배우가 되려고 고군분투하는 정년이의 꿈과 도전 이야기를 다뤘다. 웹툰 연재 당시부터 여성 팬들을 중심으로 막강한 팬덤을 형성하고, 이후 동명의 창극으로 제작돼 국립극장 무대에도 올랐다. 웹툰에 이어 창극 역시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웹툰 ‘정년이’의 열혈 팬들은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주인공 윤정년으로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단연 김태리라고 꼽아왔다. 팬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인 데는 이유가 있다. 웹툰을 집필한 서이레 작가는 처음 작품을 구상하면서 김태리의 영화 데뷔작인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아가씨’에서 김태리가 연기한 숙희 캐릭터를 보고 정년이의 외형부터 성향 등을 설정했다. 평소 웹툰을 즐기는 김태리는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정년이’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웹툰의 정년이가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궁금증이 생길 즈음 ‘아가씨’의 숙희가 정년이의 모델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년이’를 처음 소개하는 제작발표회에서 김태리는 “웹툰을 보는데 이상하게 나의 얼굴과 내 말투가 떠올랐다”며 “제가 (웹툰의) 뮤즈였다는 걸 알고 감사했고 영광이었다”고 밝혔다. 뒤늦게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작품과 캐릭터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고도 했다.
김태리는 ‘정년이’ 출연을 결정하자마자 판소리 훈련부터 시작했다. 2021년 무렵이다. 드라마에서 정년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 창을 하는 순간 모든 사람을 사로잡는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이자 무대에서 관객을 빠져들게 하는 연기력도 갖췄다. 이를 얼마나 생생하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가 갈릴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김태리는 장장 3년 동안 판소리 연습에 몰두했다. 여러 명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면서 실력을 익혔다.
실제로 김태리는 ‘정년이’ 출연을 결정한 뒤에도 영화 ‘외계+인’ 2부 개봉과 SBS 드라마 ‘악귀’ 촬영을 진행하는 등 분주한 활동을 소화했다. 틈이 나는 대로 판소리 훈련을 거듭했고, 덕분에 연예계에서는 ‘김태리가 판소리에 푹 빠져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최근 ‘정년이’가 방송을 시작한 이후 제작진은 3년간 김태리의 판소리 훈련 연습을 담은 영상을 SNS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이 급상승하는 김태리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역할을 위한 훈련이 아닌 진짜 판소리의 매력에 빠져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이다.
김태리는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소리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극 중 정년이는 목포의 바다마을에서 엄마를 도와 생선을 팔다가 국극 배우가 되려고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상경했다. 남도의 짙은 정서가 녹아 있는 사투리로 모든 대사를 소화해야 했다. 이를 위해 2022년 ‘악귀’ 촬영을 마치자마자 목포를 오가면서 전라남도 사투리를 익혔다.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김태리는 “막상 준비를 하다 보니 많이 어려웠다”며 “힘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극 중 정년이가 느끼는 성취감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배우를 꿈꾸던 시절이 떠올라
‘정년이’는 천재 소녀 정년이가 최고의 국극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뤘다. 국극은 지금의 뮤지컬과 흡사한 장르로 판소리와 연극을 가미한 무대다.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게 특징이다. 1950년대 전통성을 갖춘 대중문화로 전성기를 누렸고 지금의 아이돌 스타와 팬덤의 관계처럼 당시에도 국극을 통해 숱한 스타가 탄생하고 이들을 따르는 소녀 팬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드라마 속 정년이의 이런 상황과 도전은 배우가 되기 위해 연극 무대에 오르면서 기회를 모색한 김태리의 실제 상황과도 겹친다. 김태리는 “저 역시 배우가 되려고 준비한 시간이 있었기에 정년이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드라마에는 김태리뿐 아니라 정년이의 라이벌 허영서 역의 신예은, 당대 최고의 국극단을 이끄는 단장 역의 라미란, 소녀 팬덤을 형성한 최고의 국극 스타 문옥경 역의 정은채 등 개성 강한 캐릭터와 이를 소화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하지만 시청자의 시선은 김태리에 집중된다. 엄마(문소리 분)의 극심한 반대를 뚫고 무작정 상경해 가까스로 국극단에 입단했지만 이후로도 시기와 질투, 온갖 공격 속에 우여곡절을 겪는 정년이의 분투가 김태리의 다채로운 에너지로 표현되고 있어서다. 김태리로 시작해 김태리로 끝나는 드라마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활약 덕분에 방송 전 드마라를 둘러싸고 제기된 몇몇 우려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정년이’는 원작 웹툰을 관통하는 핵심 코드인 동성애 설정을 드라마로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했다. 웹툰에는 정년이의 성장을 돕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친구인 권부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년이와 함께 애틋한 사랑의 감정도 나누는 인물이지만, 드라마화 과정에서 ‘퀴어 코드’가 배제돼 원작 팬을 중심으로 여러 비판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연출자인 정지인 PD는 “12부작 안에 어떻게 이야기를 펼칠지, 원작을 보지 않은 시청자도 수용할지 고민하면서 메인 캐릭터(권부용)를 부득이하게 삭제했다”며 “아쉽지만 그만큼 국극단과 각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었다”고 설명했다.
방송 전 걸림돌은 더 있었다. ‘정년이’는 당초 MBC에서 편성을 확정하고 기획에 돌입했지만 제작 도중 tvN으로 채널을 바꿨다. 그 과정에서 MBC는 ‘정년이’ 제작사들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고 재산 가압류를 신청하는 등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방송 전 흘러나온 잡음으로 인해 작품이 온전히 평가받을 수 있을까 우려됐지만, 천재 판소리 소녀 정년이에 완전히 몰두한 김태리의 맹활약으로 각종 부정 이슈는 사라졌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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