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전 ‘끝내기 만루홈런’ 프리먼 MVP…양키스 저지 5차전 치명적 실책으로 고개 숙여
1~3차전을 내리 이긴 뒤 4차전을 내줘 숨을 고른 다저스는 이날 0-5로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고 승리하는 저력을 뽐내면서 1955년, 1959년, 1963년, 1965년, 1981년, 1988년, 2020년에 이은 통산 8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궜다. 직전 우승이었던 2020년은 코로나19 여파로 정규시즌 일정을 단축(52경기)해야 했던 시즌이라 162경기를 모두 치른 올해의 우승은 다저스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 다저스가 양키스를 상대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낸 건 창단 첫 우승을 이룬 1955년과 1963년, 1981년에 이어 4번째다.
2009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정상을 노린 양키스는 단 1승만 거두고 허무하게 안방에서 월드시리즈 패권을 내줬다. 양키스 간판타자 애런 저지는 5차전에서 선제 2점 홈런을 때려 마침내 월드시리즈 첫 홈런을 신고했지만, 치명적인 수비 실책으로 역전의 빌미를 제공해 고개를 숙였다.
#부상을 이긴 투혼의 MVP 프리먼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는 다저스의 베테랑 왼손 타자 프레디 프리먼(35)이 선정됐다.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다. 그는 월드시리즈 5경기에서 타율 0.300(20타수 6안타), 홈런 4개, 12타점, OPS(출루율+장타율) 1.364로 펄펄 날았다. 12타점은 단일 월드시리즈 역대 최다 기록이다. 특히 프리먼은 1차전에서 다저스가 2-3으로 뒤진 연장 10회 말에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의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트려 다저스타디움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사 2·3루에서 양키스 벤치가 무키 베츠를 고의 볼넷으로 걸러 1루를 채우고 만루 작전을 썼는데, 다음 타자로 나온 프리먼이 기다렸다는 듯 네스터 코르테스의 초구 직구를 그대로 걷어올려 우중간 담장을 넘겨버렸다. 몸쪽으로 낮게 제구가 잘된 공이었지만, 프리먼의 벼락같은 스윙에 걸려 초대형 홈런이 됐다. 심지어 프리먼은 이어진 2~4차전에서도 모두 적재적소에 중요한 홈런을 때려 양키스 마운드를 괴롭혔다. 월드시리즈 첫 4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친 선수는 MLB 역사에서 프리먼이 유일하다.
이 홈런들은 값진 기록으로도 이어졌다. 프리먼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뛰던 2021년 5~6차전에 이어 올해 4차전까지 6경기 연속 홈런 행진을 이어가 역대 월드시리즈 최다 연속경기 홈런 기록을 갈아치웠다. 또 2020년 내셔널리그 정규시즌 MVP에 이어 이날 월드시리즈 MVP로도 뽑히면서 두 개의 MVP 트로피를 모두 석권한 역대 12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ESPN은 "프리먼에 앞서 같은 위업을 달성한 선수 11명 중 10명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고 전했다. 우승을 확정한 5차전에서는 홈런이 없었지만, 1-5로 뒤진 5회 초 2사 만루에서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 역전 과정에 큰 공을 세웠다.
2010년 애틀랜타에서 데뷔한 프리먼은 빅리그 15년 차에 통산 홈런 343개를 기록하고 있는 베테랑 거포다. 그에게 올 시즌은 유독 힘든 한 해였다. 세 살배기 아들 맥시머스가 지난 7월 말 갑작스럽게 온몸에 마비 증세를 보여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검진 결과 길랭-바레 증후군이라는 희귀 신경계 질환 판정을 받았다. 이 증후군은 면역 체계가 말초 신경을 공격해 근육 손상과 마비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으로 10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병이다. 당시 휴스턴에서 원정 경기를 준비하던 프리먼은 곧바로 LA로 돌아가 아들을 간호하느라 8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가 아들을 퇴원시키고 열흘 만에 팀에 복귀하던 날, 다저스 선수들은 '#MaxStrong'이라는 문구가 적힌 파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동료를 기다렸다. 프리먼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정규시즌 막바지엔 부상의 불운도 그를 덮쳤다. 8월 중순 오른손 중지에 실금이 갔고, 9월 말엔 경기 중 오른 발목이 골절돼 포스트시즌 출전이 어려워 보였다. 의사가 4~6주 휴식을 권고했을 만큼 큰 부상이었다. 그러나 프리먼은 끝까지 포스트시즌 출전 의지를 불태웠다.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타격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점점 발목이 회복되면서 타격감도 살아났다. 결국 월드시리즈 1차전부터 맹타를 휘둘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1차전 만루홈런을 본 많은 다저스 팬은 "프리먼의 모습에 1988년 월드시리즈의 커크 깁슨이 겹쳐 보였다"며 박수를 보냈다. 깁슨은 당시 1차전에서 발목을 다친 채로 끝내기 홈런을 친 뒤 절룩이며 베이스를 돌아 감동을 안긴 '투혼'의 아이콘이다. 실제로 현지 캐스터는 프리먼의 홈런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자 36년 전 깁슨 때와 똑같은 '홈런 콜'을 재현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했다.
프리먼은 "올해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과속방지턱'을 마주한 것 같다. 그걸 동료들과 함께 극복한 것은 무척 특별한 일"이라며 "우리 가족이 그때 겪은 고통은 다시는 벌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맥시머스는 다행히 잘 이겨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훌륭한 동료를 둔 축복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이렇게 MVP도 받았다. 지금은 황홀한 마음뿐"이라고 감격했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프리먼은 우리 모두에게 정말 좋은 본보기기 되고 있다. 팀에 필요한 모든 면을 종합해 한 명의 선수만 고를 수 있다면,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라고 극찬했다. 팀 동료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도 "프리먼은 올해 많은 일을 겪었지만 항상 긍정적 자세로 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프리먼다운 활약을 봤다"고 지지했다. 개빈 럭스는 "프리먼은 여기저기 뼈가 부러진 채로 경이로운 활약을 했다"고 감탄했고, 키케 에르난데스는 "프리먼처럼 열심히 하는 슈퍼스타는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저지와 콜은 울고
월드시리즈 통산 최다 우승(27회)에 빛나는 양키스와 올해까지 1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다저스는 1981년 이후 43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었다. 미국 동부의 대표도시 뉴욕과 서부의 상징 LA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은 MLB에서 가장 큰 팬덤을 자랑하는 인기 팀이자 수많은 역사를 공유하는 대표 명문 구단이다. 전 세계 야구팬이 기다리던 '꿈의 매치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양대 리그 홈런왕이자 '50홈런 타자'인 오타니 쇼헤이(다저스)와 애런 저지(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정면승부는 우승 경쟁의 하이라이트로 큰 관심을 모았다. 두 선수가 올해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MVP를 사실상 예약한 상태라 더 그랬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게 별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승부는 예상보다 빠른 5차전에서 끝났고, 오타니와 저지 모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월드시리즈를 마감했다.
특히 저지는 4차전까지 홈런 없이 타율 0.133(15타수 2안타) 1타점에 그쳐 1~3차전 3연패의 원인 제공자로 꼽혔다. 그런 그가 5차전 1회 말 1사 1루 첫 타석에서 선제 2점 홈런을 터트리자 현지 중계 해설자는 "잠자던 거인이 깨어났다!"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양키스 팬들도 소셜미디어(SNS)에 "저지가 살아난 양키스는 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팀이다" "이제 '리얼' 양키스를 볼 수 있다" 등의 환호를 앞다퉈 올리며 대반격을 기대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저지는 5회 초 무사 1루에서 다저스 토미 현수 에드먼의 평범한 플라이 타구를 잡지 못해 다저스에 절호의 역습 기회를 안겼다. 타격이 부진했던 1~4차전에선 견고한 중견수 수비로 체면치레를 했는데, 타격감이 살아난 5차전에선 수비로 고개를 숙이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 후 찾아온 2사 만루 위기에선 양키스 에이스 게릿 콜이 무키 베츠의 1루수 땅볼 때 1루 커버를 깜빡해 내야 안타로 만들어주는 본헤드 플레이까지 저질러 경기 흐름을 넘겨줬다. 저지는 9년 3억6000만 달러, 콜은 9년 3억2500만 달러에 계약한 양키스 최고 몸값 타자와 투수다. 가장 큰 활약을 해야 할 선수들이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범해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결국 양키스가 1점 차 역전패로 월드시리즈를 마감하게 되자 더그아웃에서 멍하니 울먹이는 저지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오타니와 야마모토는 웃고
오타니도 월드시리즈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5경기에서 타점 없이 타율 0.105(19타수 2안타)를 기록한 게 전부다. 2차전에서 승부와 큰 관계없는 도루를 시도하다 어깨를 다쳐 100%의 공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상 이후에도 매 경기 1번 타자로 출전해 양키스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안겼고, 승리 뒤엔 그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우승 세리머니에 참여했다. 평소 몸 관리를 위해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데, 라커룸에서는 샴페인 파티를 벌이면서 여러 종류의 주류에 흠뻑 젖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세리머니는 차분한 편인데, 미국에선 다른 방식의 세리머니를 해서 정말 즐거웠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승을 향한 오타니의 집념은 널리 알려져 있다. LA 에인절스 소속이던 지난해까지 6년 동안 가을야구 문턱을 밟지 못했던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다저스와 역대 프로스포츠 최고액인 10년 총액 7억 달러에 계약했다. 그런데 그 중 97%에 해당하는 6억 8000만 달러를 계약기간 이후인 2034년부터 2043년까지 무이자로 나눠 받기로 했다. "향후 팀이 우승을 위한 전력을 꾸리는 데 내 몸값이 걸림돌이 되면 안 된다"며 자신이 먼저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그를 욕심 낸 수많은 팀들 중 다저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도 "우승할 수 있는 팀에 가고 싶다"는 의지였다. 공식 입단 인사에서는 "다저스 구단과 나는 'LA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퍼레이드를 벌이겠다'는 목표를 공유한다고 100% 확신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디 애슬레틱은 "오타니의 지급 유예 결정 덕분에 다저스는 현금 운용에 유연성을 더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다저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최고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에게 역대 MLB 투수 최고액인 12년 3억 2500만 달러를 안기면서 치열한 영입전의 승자가 됐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6⅓이닝 1피안타 1실점으로 역투해 승리 투수가 됐다. 지난겨울 다저스의 투자가 헛된 지출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경기였다. 다저스 이적 첫 시즌에 곧바로 꿈을 이룬 오타니도 내년 시즌 자신과 원투펀치를 이룰 야마모토의 호투를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타니는 우승 직후 "다저스에서 첫해부터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건 정말 엄청난 일"이라며 "다저스의 힘으로 정규시즌을 무사히 마쳤고, 포스트시즌도 팀의 힘으로 이겨냈다. 이런 팀의 일원이라 영광"이라며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물론 오타니의 우승 기여도를 월드시리즈 성적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오타니는 올해 정규시즌에 MLB 역대 최초로 50홈런(54개)-50도루(59개) 클럽의 문을 열면서 다저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아시아 선수 한 시즌 최다 타점(130점)과 통산 최다 홈런(225개) 기록도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놨다. 정규시즌 개막 직후 오랜 기간 가족처럼 지낸 통역사 미즈하라 잇페이의 불법 도박 스캔들이 터져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올해 초 결혼한 아내 다나카 마미코와 함께 아픔을 이겨내고 곧 제 실력을 되찾았다. 다음 시즌에는 팔꿈치 재활을 마치고 다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할 계획이라 다저스 팬들의 '왕조 구축'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월드시리즈의 '글로벌' 흥행 기여도는 오타니가 단연 1위다. ESPN에 따르면, 올해 월드시리즈 1~2차전의 일본 평균 시청자 수는 약 1515만명 으로 집계됐다. 다저스가 끝내기 승리를 거둔 1차전 시청자가 1440만 명이었고, 오타니와 야마모토가 함께 출전한 2차전 시청자는 무려 1590만 명에 달했다. 1~2차전 미국 내 평균 시청자(1455만 명)보다 100만 명 이상 많은 숫자다. 오타니가 고교 시절까지 살았던 고향 일본 오슈시에서는 아예 시청과 문화회관에 수백 명이 모여 함께 월드시리즈를 관람하며 단체 응원을 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다저스가 우승한 직후에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스포츠닛폰이 호외(중요한 소식을 속보로 전하기 위한 임시 발행 인쇄물)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ESPN은 "월드시리즈 트로피는 LA로 향하고 있지만, 우승 파티는 일본까지 확대되고 있다"며 "일본에서 신문을 나눠주는 것은 큰 행사가 벌어질 때 도쿄의 전통이다. 오타니의 '우승 신문'을 받으러 도쿄 기차역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타니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날 응원하기 위해 먼 미국까지 와준 일본 팬들에게 감사드린다"며 "그 응원이 내게 에너지를 줬다. 승리로 이 감사의 마음을 되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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