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에 소리 더 키워
송해면 주민 A 씨(38)는 지난 7월 어느 날 ‘찌지직’거리는 잡음을 들었다. 소리는 마을 전체에 울릴 정도로 컸다. 처음에는 마을 이장이 방송용 마이크를 잘못 놓은 줄 알았다. 이 정도 크기의 소리를 낼 만 한 물건은 방송용 마이크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북한 땅에서 넘어오고 있었다. 3개월 넘게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북한 대남방송의 시작이었다.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 커졌다. 북한이 언덕에 설치한 스피커에서는 매일 다른 소리가 나왔다. 어느 날에는 쇠를 깎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날에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귀신 소리와 유사한 소음이 들려왔다. 짐승의 하울링이나 깔깔거리는 여자 웃음소리도 나왔다. 소음은 24시간 내내 울렸다. A 씨는 “어제는 남자가 깔깔 웃는 소리가 나왔다. 북한이 어떻게 하면 사람이 공포스러워 할 수 있는 소리가 있을까 찾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송해면 토박이인 A 씨는 이런 유형의 대남방송은 처음 겪는다고 했다. 그를 비롯한 주민들은 지금껏 대남방송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은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지다. 인근 해안선에는 약 50km의 철책이 있다. 해병대 2사단이 경계를 선다. 탈북 등 북한과 관련된 자잘한 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1962년 북한은 먼저 대남방송을 시작했다. 대남방송 소리가 철책을 넘어 마을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북이 방송을 잠시 중단했다. 1980년대 들어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확성기 방송이 재개됐다. 2004년 남북은 다시 확성기 방송 중단을 합의했지만,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또다시 확성기 방송을 주고받았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방송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 6월 북한 오물풍선 사건을 시작으로 이 합의는 깨졌다.
주민들은 지금까지의 대남방송은 라디오 같았다고 했다. 북한 음악이나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방송이 나왔다. 온종일 방송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주민들은 남측에서 대북방송을 틀면 대응 차원에서 잠깐 방송을 내보내는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북한 노래를 외우고, 흥얼거리는 노인들이 있을 정도였다. 대남방송이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정도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던 셈이다.
송해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60대 사장도 과거 대남방송이 삶에 지장을 준 적은 없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이 대남방송이라는 북한의 위협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젊었을 때 가끔 친구들과 해안가에 나가 북한이 설치한 스피커를 구경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 대남방송은 이례적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과거에는 대북방송이 들려도 남북한이 싸운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겠다는 악의만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총성만 들리지 않는 국지전’ 같다고 표현했다.
이례적인 수준의 대남방송이 3개월 넘게 지속되자 주민들은 일상이 망가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한 60대 주민은 잠자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북측에서 저녁 시간에 소리를 크게 키우면서다. 저녁 시간이 되면 소음이 집 벽과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그는 북한이 주민들을 괴롭힐 목적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TV 소리를 크게 키워서 소음이 들리지 않게 할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최악까지 가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경이 곤두섰다. 불안증세도 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떠날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전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땅과 집을 소유하고 있다. 대대로 상속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는 사람들이 뿌리내린 터전이 있다. 땅이 있고 집이 있다. 이것을 버리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은 일이다. 나가려고 해도 (가산을 정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다수의 주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아이들의 마음이 멍들고 있었다. A 씨는 아이가 혼자서는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가면 귀신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생활도 변했다. 소음이 커지기 전 아이를 재우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아이를 재우면 소음이 커졌다. 집 안을 뚫고 들어온 소음에 잠을 설치게 됐다. 머리맡에 스마트폰을 두고 자장가를 틀어도 잠들기 쉽지 않다고 했다.
A 씨는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7년 전에는 집도 새로 장만했다. 대남방송이 시작되자 청력이 좋지 않은 어머니가 잠들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답답하다며 창문을 조금 열고 잠자리에 들었던 어머니는 소음을 막기 위해 창문을 닫았다.
친척들의 발걸음도 끊겼다. A 씨의 집은 형제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집 바깥에는 항상 차가 많았다. 12명이나 되는 어린 조카들은 이 씨의 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잔디밭에서 놀았다. A 씨는 “대남방송 소리 한번 듣고 나서 애들이 소리 지르면서 무섭다고 했다”며 “7년 전 집을 짓고 정착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후회가 많이 든다. 차라리 이 대남방송을 일찍 했더라면 안 내려왔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북한 탓만…
국방위 국감에 참석한 안미희 씨는 정부가 주민들의 피해를 외면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소음 피해가 심각해지자 안 씨는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관계기관에 구제 요청을 하러 다녔다. 면사무소, 강화군청, 인천시청, 국방부, 외교부 등에 민원을 넣었다. 성과는 없었다. 안 씨는 담당자들이 ‘책임은 북한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만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담당자 연결도 어려웠다고 했다. 국방부는 서면 답변에서 북한이 오물풍선을 살포하고 대남방송을 실시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북한에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직접적인 해결을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 드린다”고 했다. 국방부가 8차례 보낸 서면 답변은 글자 하나까지 똑같았다.
지난 9월경 강화도 주민들의 대남방송 소음 피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연일 기자들이 강화군을 찾았다. 박선원 민주당 의원은 9월 13일 송해면 주민들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박 의원은 주민들이 국감장에 나올 수 있도록 주선한 것으로 전해졌다. 10월 31일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현장을 찾았다.
주민들에 따르면 정치권과 언론이 움직였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온 것은 없었다고 했다. 방음벽 설치나 주민 피해보상에 대한 논의도 지지부진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지역구 의원인 배준영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에 대한 불만도 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배 의원이 뒤늦게 관심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지역구 정치인도 오는데 (배 의원은) 정치인 중 가장 늦게 왔다”며 “배준영 뭐하냐는 목소리가 크다”고 했다. 배 의원은 9월 27일 송해면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국민의힘은 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정부나 정치권에서 나온 실질적인 보상이나 해결 방안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강화군은 11월 1일부터 강화군 전 지역을 위험구역으로 지정했다. 이날부터 강화군 내 대북전단 살포자 출입통제 등이 시행된다.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피해보상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들이 원하는 건 대남방송의 완전 중단이다. 필요하다면 군 대북방송을 중단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서는 ‘이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지나치게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주민들은 북한을 자극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 소음 공격이 더 심해진다고 느끼고 있었다.
다만 일부 주민들은 현실적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대남방송을 중단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정부가 방음 장비 설치를 지원하고, 주민들의 피해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소음으로 가축이 새끼를 사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서해 5도 지원 특별법’ 같은 지원법안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법은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주민에게 매달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정한다. 지리적 여건상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 피해를 보는 주민들에게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취지로 도입됐다. A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해 5도 특별법’ 같은 법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피해를 보니까 이런 것을 알아보게 됐다. 우리는 (이 법안에) 부합하지 않은 항목이 하나도 없다. 실질적인 피해가 있다. 말 그대로 소음 폭격을 맞고 있다. 정부는 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 건가.”
코너 중간 BTS 노래가…'오물풍선 대응' 대북방송도 재개
지난 6월 군은 6년 만에 대북방송을 재개했다.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에 대한 대응이었다.
군은 모든 고정식 확성기를 시간대별로 나눠 방송하던 방식을 동시에 가동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확성기는 고정식 24개, 이동식 확성기 16개 등 총 40개가 운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성기에서는 대북 심리전 방송 ‘자유의 소리’가 나온다. 뉴스 코너에서는 북한 관련 소식을 주로 소개한다.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제 움직임을 알린다. 북한의 외부 영상물 시청 및 유포에 관한 단속과 검열 문제 등 북한 내부 문제를 언급한다.
뉴스 코너가 끝나면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이후 북한 지역별 날씨나 ‘북한 장마당 물가 동향’ 등 생활 관련 뉴스를 전한다. 6월 첫 대북방송에서는 아나운서가 “북한 지역마다 물가 동향 틀릴 수 있으니 참고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말과 평양말 차이를 해설하는 코너도 있다. 코너 중간 방탄소년단 등 인기 K팝 가수 노래가 송출된다.
군은 매일 10시간씩 이 같은 내용을 방송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방송은 약 10km 떨어진 북한 개성시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