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미국의 선택은 다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8)이었다. 이른바 ‘트럼프 2.0’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로써 트럼프는 130년여 만에 처음이자 역사상 두 번째로 비연속적으로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 됐다(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각각 1886년과 1894년에 당선됐다). 초접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결과는 다소 싱거웠다. 트럼프가 경합주 7곳을 싹쓸이하면서 그야말로 미국 전역을 공화당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물들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였던 미시간마저 트럼프를 선택했을 정도로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기세는 등등했다. 게다가 흑인과 히스패닉 등 대표적인 민주당 지지층마저 대거 이탈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투표 직후 미국을 비롯한 해외 언론들은 즉각 트럼프의 귀환에 대한 각종 분석을 쏟아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분석은 하나로 수렴됐다. ‘트럼프가 바로 지금의 미국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더 이상 일탈이 아니다. 그가 미국의 표준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전략 고문을 지낸 피터 H. 웨너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는 미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CT스캔(컴퓨터단층촬영)과 같았다. 그 결과 드러난 것은 부패한 인물에 대한 무서운 동질감이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 미국인이 다시 트럼프를 선택한 데 있어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엄연히 사기, 부정행위, 성적 학대, 명예훼손 등으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중범죄자라는 데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에게 이런 범죄 이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나는 박해 받은 희생자다”라는 트럼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실제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들 가운데 25%만이 그의 범죄 이력이 투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결과, 미국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됐다.
이런 핸디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온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미국: 그의 복귀는 다른 종류의 국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엘립스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 카멀라 해리스는 트럼프를 가리켜 미국을 대표하지 않는 아웃라이어(왕따)라고 조롱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사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적어도 대부분의 미국인일지 모른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가정은 화요일 밤 붉은 물결에 휩쓸려 버렸다”면서 “정치권은 더 이상 트럼프를 단순한 일탈로 치부할 수 없게 됐다.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는 이제 자신만의 이미지로 미국을 재편하는 혁신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라고 분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트럼프가 미국인들의 위기감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미국인들은 입헌주의를 중시하면서도 전쟁이나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여느 나라처럼 강력한 지도자(스트롱맨)를 원하곤 했다. 대중은 그런 인물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길 원했고, 바로 그 점을 공략했던 트럼프는 미국을 위해 싸우는 자신의 투쟁을 일종의 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갈망을 자극했다.
역사학자이자 ‘스트롱맨: 무솔리니에서 현재까지’의 저자인 루스 벤-기앗은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미국 민주주의를 실패한 실험으로 생각하도록 미국인들을 조건화해 왔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과 같은 독재자들을 치켜세우면서 미국인들이 독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이용했다”고 덧붙였다. 이민자들을 가리켜 ‘우리나라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반대파를 가리켜 ‘해충’ ‘내부의 적’으로 낙인찍는 등 나치와 소련 시대의 어휘를 채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였다. 심지어 군대를 동원해 반대파를 소탕할 가능성까지 언급했다는 점을 예로 든 벤-기앗은 “트럼프의 승리는 미국의 이런 모습과 정치적 문제 해결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승리했음을 의미한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트럼프가 이런 위협을 실제 실행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마크 쇼트는 “나는 트럼프가 말처럼 그렇게 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연극적인 요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보다 우려되는 점은 향후 4년간의 혼란과 불확실성이다. 쇼트는 “인사뿐만 아니라 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해리스의 정책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아마 트럼프 자신이 정책을 자주 바꿀 것이다. 오늘의 입장이 다음 날이면 갑자기 달라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의 승리가 갖는 의미에 대해 ‘아직은 미국이 여성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이 점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던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공개적으로 남성 유권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을 벌였다. 가령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우람한 근육질의 헐크 호건이 셔츠를 찢으며 등장했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는 마초적인 발언과 함께 심지어 마이크에 대고 성행위 동작을 흉내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선거 당일 트럼프의 보좌관인 스티븐 밀러는 소셜미디어(SNS)에 “아직 투표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면 투표소로 데려가라”는 독려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여성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해리스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여성 유권자의 절반가량은 해리스를, 남성 유권자의 절반가량은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이는 4년 전 선거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낙태권을 내세우면서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노렸던 해리스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었다.
이와 관련, ‘가디언’은 “슬프지만 반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이 트럼프의 승리를 이끌어냈다”면서 “대부분의 미국 남성들은 억만장자와 공통점이 없지만, 그(트럼프)는 그들의 분노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분석했다. ‘데일리비스트’ 역시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유명인들을 앞세워 선거운동을 펼친 트럼프의 전략이 먹혔다고 말했다. 가령 헐크 호건부터 UFC 창립자 데이나 화이트까지 마초 이미지가 강한 프로레슬러들이 선거 기간 내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바로 이들의 지지가 당선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성층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팟캐스트 진행자 조 로건과 미국 최고의 억만장자이자 남성미 넘치는 일론 머스크의 지지 역시 승리를 이끈 주요 요인이었다.
이번 선거로 미국이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진 나머지 이제는 양쪽이 서로를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시대가 됐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트럼프 시대의 분열을 치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의 책임도 크다. 해리스는 바이든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후 처음에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희망찬 비전을 강조하며 민주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부동층의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했다. 공화당의 카를로스 커벨로 전 하원의원은 “그들의 실패는 정치에 대한 더 큰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트럼프 지지층을 다시 결집시켜서 그가 다시 한 번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고 비난했다. 실제 해리스는 막판 유세에서 통합을 촉구했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다’는 그의 메시지는 트럼프의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라는 호전적인 메시지에 밀리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트럼프의 승리가 부분적으로는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덕분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다시 말해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이 결과적으로는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의미다. ‘데일리메일’은 ‘카멀라가 실패한 진짜 이유’라는 기사에서 “트럼프가 돌아왔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건 조 바이든의 패배였다”라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러면서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여러 악행을 눈감은 이유가 그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그가 적어도 바이든보다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가령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는 수년간 치솟기만 했고, 국경은 개방되었으며, 범죄 역시 급증했다. 푸틴과 하마스는 날뛰었고, 성별에 대한 극단적인 정책으로 인해 남성이 여성 스포츠에 진출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해리스가 바이든과 거리를 두지 못했던 점은 그가 패배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해리스는 현직 부통령이라는 지위 때문에 ‘변화의 후보’라는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 해리스가 ABC방송의 ‘더 뷰’에 출연해 바이든 대통령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장면은 트럼프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지금 해리스 캠페인의 치명적인 결함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이를 가리켜 TBS뉴스는 “골키퍼가 상대 공격수에게 직접 공을 던져주는 것과 같았다. 일대일 상황에서 트럼프는 오픈골을 넣었다”라고 조롱했다.
낙태권을 주요 어젠다로 내세운 민주당의 전략도 패배 요인으로 꼽힌다. 물론 일부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은 경제, 국경, 국가 안보 문제보다 낙태 문제에 집중하라는 해리스의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다. ‘데일리메일’은 “해리스의 가장 큰 실수는 여성들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표를 던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데 있었다. 얼마나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였는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해리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특정 인구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유색인종이든 아니든 여성 집단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라고 말했다.
낙태권은 실제 많은 여성에게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여성들이 유일하게 낙태권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생각은 단순하며, 그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여성들이 경제, 이민, 질서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무례한 태도였다. 여성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택한 제니퍼 로페즈와 카디 B 같은 유명인사들도 사실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여성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미국인들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수백만 명은 바이든보다 트럼프가 집권할 때 개인의 삶이 더 나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궁극적으로 대중들은 트럼프의 범죄 행위보다 바이든 정부 아래에서의 인플레이션에 더 분노했다.
트럼프에게 힘을 실어준 미국인들은 이제 선거 구호 그대로 그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주길 희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트럼프의 승리는 새로운 미래의 시작이자 정당한 회복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미국인들, 심지어 트럼프를 지지한 일부조차도 트럼프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을 좋아할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과 현실은 분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경제학자들은 그의 정책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가정의 지출을 매년 수천 달러씩 증가시키며, 글로벌 무역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백신에 반대하는 공중보건 공무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공약은 새로운 전염병의 전국적 유행을 초래할 수 있으며,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는 계획은 납세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짐을 지울 수 있다. ‘데일리메일’ 역시 “그가 진정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 국가 부채, 불법 이민, 중동 상황,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장애물은 많고 다양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미국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미국인들은 그 변화를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여왕을 배신” 트럼프의 일침…해리 왕자 정말 추방될까
트럼프가 돌아오면서 좌불안석이 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면 어쩌면 해리 왕자 부부일 수 있다. 트럼프가 영국 왕실이라고 해서 비자 문제에 있어 ‘특별한 대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실제 트럼프는 2020년 해리 왕자가 영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자 그를 비난하면서 고인이 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지난 3월에는 캘리포니아 몬테시토에 거주하고 있는 해리 왕자가 미국 입국시 비자 신청서에 마약 사용 여부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미국에서 추방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해리 왕자의 비자 신청서를 공개하라며 소송을 제기한 헤리티지 재단을 언급한 배경도 이 때문이었다. 헤리티지 재단은 2023년 1월에 출간된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에서 그가 코카인, 마리화나, 환각 버섯 복용을 언급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2020년 배우자인 메건 마클과 함께 미국 입국이 허용된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워싱턴 DC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인 이 단체는 정보 자유 요청이 거부된 후 현재 국토안보부(DHS)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트럼프는 보수정치행동 회의에서도 바이든 행정부가 해리 왕자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그에게 “너무 관대했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나는 그를 보호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는 여왕을 배신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이 문제가 나에게 달려 있었다면 해리 왕자는 혼자가 됐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리 왕자 부부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트럼프 당선은 이들 부부에게 악몽일 수 있다.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인 2020년 9월, 부부는 그해 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들에게 ‘혐오 발언, 잘못된 정보, 온라인에 떠도는 부정적 여론을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부부는 특정 후보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지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영상 메시지는 분명히 트럼프를 겨냥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사실 이는 ‘영국 왕실 구성원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점에서도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트럼프는 백악관 브리핑에서 부부의 이 발언에 대해 “나는 그(메건)의 팬이 아니다. 그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해리에게 많은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행운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행운을 빌어야 할 때는 4년 전이 아니라 지금일지 모른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