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외국 처벌 대상 확대’ 법사위 소위 통과…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과 연계시 여야 대립 불가피
형법 제98조(간첩법)에 규정된 간첩의 처벌 범위는 ‘적국’에 국한된다. 이 범위를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장하는 법안이 11월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1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또한 간첩 행위에 대한 양형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간첩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간첩법 위반 시 3년 이상 징역의 양형 기준이 적용될 전망이다.
간첩법 개정(형법 일부 개정)은 제21대 국회에서도 추진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계류하다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그동안 축적된 각종 이슈들을 비롯해 대한민국 국민이 중국 현지에서 반간첩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례가 알려지며 간첩법 개정 필요성이 다시 강조됐다. 제22대 국회에서 간첩법 개정은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새다.
지금까지 간첩 행위가 의심되는 외국인들에 대한 수사엔 간첩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 6월 25일 부산항에 입항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을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 유학생 3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받았다. 전직 공작원들은 이들이 중국 측 블랙요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관련기사 혹시 중국 블랙요원? 미국 항공모함 ‘도촬’ 미스터리).
11월 9일엔 한 40대 중국인 남성이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서 드론 카메라를 띄워 헌인릉을 촬영하다가 인근 국정원 건물까지 촬영한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해당 남성에게 출국정지 조치를 내리고 불구속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남성은 항공안전법 위반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
2022년 연말엔 송파구 한강변 중식당이 중국 비밀경찰 거점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중식당 사장인 중국인 왕하이쥔 씨는 “친미세력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의혹을 부인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선 왕 씨가 ‘특무 요원(공작원)’일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다(관련기사 ‘특무’의 향기가…공작원 출신들이 본 중국 비밀경찰 의혹).
지난 2월 경찰은 왕 씨에 대한 강제수사에 돌입했다. 경찰은 업무상 횡령 혐의를 적용해 왕 씨를 둘러싼 자금 흐름을 수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 씨 자금흐름이 중국 정부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도 살펴봤다고 한다.
한 중국 소식통은 “중국인이 국정원을 몰래 촬영한 사건이나 그동안 불거진 각종 이슈들이 중국에서 똑같이 일어났다고 가정한다면, 거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강력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중국 공산당은 과거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밀정(간첩)들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반간첩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중국에서 약 10년 동안 구류된 경험이 있는 사업가 A 씨는 “베이징 남동쪽에 위치한 중국 사법부 직할 연성감옥이라는 곳에 간첩죄로 복역하는 재소자들이 많다”면서 “대만인들이나 중국 군인 출신들이 대부분 중국 현지 반간첩법을 위반해 수감돼 있다”고 했다. 그는 “굉장히 사소한 이유로 체포됐어도 반간첩법 혐의가 적용되면 최소 10년 정도는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A 씨는 “중국이 한국 여권 소지자들에게 ‘무비자 15일 체류’를 전격 허용한 뒤에도 가장 큰 당부사항으로 거론된 것이 반간첩법을 유의하라는 내용이었다”면서 “양국 간 간첩 혐의에 대한 처벌 수위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은 상당한 문제 소지가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 대응을 보면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는 간첩죄라는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면서 “조금 시각을 바꿔 생각해보면 법적 테두리가 마련되지 않을 경우 각국 정보기관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무법지대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는 간첩이 없다”면서 “정말 간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간첩질을 하다 잡혀도 간첩 혐의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사실상 전무한 까닭”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 평화무드를 강조하는 정권이 들어설 경우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정치적 논란이 불거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서 “그렇게 되면 현행 간첩법에서 규정하는 ‘적국’의 범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 된다”고 했다.
그는 “세계 모든 국가에서 정보전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누군가가 공작을 하다가 다른 나라에서 발각되면 간첩죄로 처벌되는 것이 정보전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선 공작활동을 펼치다 발각이 되더라도 처벌 수위가 높지 않다”면서 “외국 간첩들이 보다 공격적으로 정보전에 나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간첩법 개정을 계기로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간첩법 개정이 산업스파이 수사 등을 통해 국익을 지키는 데 제대로 쓰이려면 그 법을 적용해 국정원이 수사할 수 있도록 대공수사권 정상화가 필요하다”면서 “(법 개정을) 당이 끝까지 챙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이번에는 민주당도 반대 안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면서 “다른 나라 대부분이 이렇게(간첩법 적용 범위를 ‘외국’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라고 했다.
1953년 제정된 형법에 포함된 뒤 한 차례도 개정된 이력이 없는 간첩법(형법 제98조)은 일본 전시형법을 모방한 조문으로 평시에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잇따라왔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간첩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배경이다. 법사위 전체회의를 거쳐 본회의 상정 및 의결이 될 경우 법 개정이 이뤄지게 된다.
야권에서도 간첩법 개정안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여당이 간첩법 개정을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 추진과 연계할 경우 더불어민주당이 반발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이번 간첩법 개정안이 여야 관계의 새로운 변수로 거론되는 배경이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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