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신화처럼 실제보다 부각되는 느낌도 있지만, 그 시절 주요 기업인이 보여줬던 기업가 정신과 진취적인 결단력 역시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주요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리더십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대와 사회 자체가 권위주의적이었고, 국가 차원에서도 지상 최대 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존재로 인식되던 대기업집단의 1, 2세대 총수는 국가권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한 아무런 견제 없이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성장 모델에 밝은 면만 있지는 않았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대기업집단의 후진적인 소유·지배구조는 가장 어두운 부산물이다. 총수일가나 지배주주의 의한 지배권 남용, 사익편취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눈감아줬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이러한 병폐가 지속가능한 성장과 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자본시장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구조적인 저평가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이제는 대기업집단 총수나 소수의 지배주주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게끔 하고, 무엇보다 기업지배구조의 주안점을 전체 주주의 이익에 두도록 개선해나가야 한다. 이는 기업문화는 물론이고, 자본시장과 사회 전반의 인식에 관한 문제인 만큼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개선을 이끌 수 있는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도입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법 개정의 당위성을 이해해야 한다.
주주 충실의무는 쉽게 말해, 경영진(이사)에게 전체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법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입법 예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법으로 정하면 경영진이 위험 감수를 회피하도록 하는 일종의 위축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도 우려한다. 경영진은 오직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제 역할을 다하면 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하지만 당연한 것이 현실에서는 당연하게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 모두가 공유하는 당위적인 믿음과 달리 현실에서는 전체 주주와 회사의 이익보다 총수나 지배주주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의사결정이 빈번히 이루어져 왔다. 주주 충실의무는 굳이 법으로 따로 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다.
진취적이어야 할 경영진이 위축될 수 있다는 반론은 합리성은 둘째 치고,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한강의 기적’ 시절의 성장 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주장이다. 자본시장 논리에 어긋나는 불공정함을 눈감아준다고 해서 총수나 지배주주의 기업가정신이 새롭게 피어날 리 만무하다. 만의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공정해야 발휘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은 이 시대에 필요한 지속가능한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주주 충실의무를 명시한 법은 없었지만 적어도 말로는 모든 상장회사가 주주의 이익을 위한다고 공언해왔다. 즉, 주주 충실의무는 이미 기업이나 자본시장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당연한 가치다.
당연한 만큼 주주 충실의무를 제도적으로 도입한다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만능열쇠처럼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모든 구조적 병폐가 해결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난제일수록 때로는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해결해 나가야 한다. 주주 충실의무가 도입돼 고질적인 기업지배구조 병폐를 개선해나가는 큰 첫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노종화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다. 현재(2017년 5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상근)으로도 재직 중이다.
노종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