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안 통과 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주주 이익 보호 ‘충실의무’ 등 도입으로 기업 지배구조 혁신 기대
전문가들은 이번 개정안을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최대 규모의 자본시장 개혁으로 평가하고 있다. 상법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기업 경영 투명성이 높아지고 소액주주 권리가 대폭 강화되면서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번 상법개정안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도입이다. 개정안은 이사가 총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할 의무를 명문화했다. 둘째,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각 주주가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받아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셋째,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와 전자주주총회 병행 개최 의무화다.
이 가운데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을 만큼 도입된다면 국내 자본시장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측된다. 남양유업 감사이자 기업 거버넌스 전문가 심혜섭 변호사는 “3개 전부 도입된다면 한 번에 국내 자본시장이 최소 일본 자본시장 이상으로 거버넌스 퀄리티가 올라갈 수 있다. 3개가 동시에 논의되고 있지만 사실 각 제도가 단독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가질 만큼 중요한 사안들”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도입은 한국 증시의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핵심 열쇠로 평가받고 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사는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든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인정하고 있다”며 “민주당 원안대로 통과된다면 2년 내 코스피 지수가 2배 정도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이사회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개정안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이번에야 말로 상법개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위기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도입은 총수 일가나 경영진의 사적 이익을 위한 자본거래로부터 일반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예를 들어 총수 가족이 전환 가격을 낮게 책정한 전환사채를 발행해 일반 주주의 지분가치를 희석시키거나 불리한 합병 비율로 계열사 간 합병을 진행해 총수 가족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등의 행위를 막을 수 있다. 대표이사 재선임을 위해 회사 자금으로 매입한 자사주를 우호 주주에 매각하거나 교환해 일반 주주의 이사선임권을 침해하는 것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현행법상 이사들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지지 않아 일반 주주들이 이러한 거래에 대해 이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검찰에 고소할 수 없다. 또 회사에 직접적인 손실이 없다는 이유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상법 개정을 통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가 도입된다면 이사들은 총수 일가 등 일부 주주만 유리한 자본거래 안건이 이사회에 상정될 때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 기업들의 주주 이익 침해 사례는 불공정한 합병 비율 설정, 물적분할과 중복상장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분리상장,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가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김규식 이사는 “대법원이 삼성전자-제일모직 합병 판결에서 주주 보호 의무가 없다고 판단하며 주주 수탈이 범람하기 시작했다”며 “이 판결이 국내 거버넌스 환경을 30년 전 수준으로 돌려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주주 이익을 헐값으로 탈취하는 건 범죄 행위로 미국이라면 감옥에 들어가서 못 나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도 핵심 변화다. 현재는 정관으로 배제할 수 있어 유명무실했으나 상법개정안이 원안대로 통과된다면 정관으로도 배제가 불가능하다.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수주주들도 이사 선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면 주주는 이사 선임 결의에서 1주당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가진다. 이 의결권은 특정 이사 후보 한 명에게 몰아줄 수도 있고, 여러 후보에게 나눠서 투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주주총회에서 이사 5명을 선임할 경우 주주에게는 1주당 5개 의결권이 주어진다. 주주는 이 5표를 한 후보에게 몰아줄 수도 있고 여러 후보에게 나눠 투표할 수도 있다. 투표 결과, 최다 득표자부터 순서대로 이사로 선임된다. 소액주주의 표가 지금까지는 유명무실했지만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이사 몇 명에게 표를 몰아 이사회에 참여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도 강화된다.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기업의 경우 감사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감사위원회 3명 가운데 2명 이상을 다른 이사들과 분리해 선출해야 하며, 이때 지배주주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지금은 1명만 분리선출이었기 때문에 감사위원 3명 가운데 1명만 외부주주여서 목소리가 묵살된 경우가 많았다. 상법개정안으로 2명이 외부 몫이 되면 이들이 과반을 차지하므로 실질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전망이다. 또 모든 상장사는 전자투표제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하고, 기존 사외이사는 ‘독립이사’로 명칭이 바뀐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에 결사반대 입장이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명시가 기업의 투자와 신산업 진출을 어렵게 하고, 소송 남발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와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관련해서는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해’와 ‘먹튀 조장’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우려가 과도하다고 반박한다. 특히 소액투자자(개미투자자)들은 지금까지 먹튀를 해온 게 해외 기업이 아니라 국내 기업 총수 일가라고 지적한다. 소액투자자이자 직장인 권 아무개 씨는 “LG화학에 투자했다가 LG에너지솔루션(엔솔)이 물적분할 후 상장하면서 큰 손해를 봤다. 이번에 두산밥캣 합병으로 또 다시 큰 손해를 봤다. 국내 개미투자자를 지금까지 수없이 약탈해온 게 해외 투기자본인지 국내 일부 총수 일가 지분인지 묻고 싶다”며 “국내에 투자하면 바보 취급당하는 지금 분위기를 ‘재계’라는 곳만 모르는 건지 황당하다. 재계 말대로라면 미국은 해외 투기자본 경영권 침해가 매우 가능한 시장인데 왜 모든 사람들이 미국에 몰려가서 투자를 하는지 묻고 싶다”고 분노했다.
대다수의 회사법 학자들은 이사와 회사 또는 이사와 주주의 이해가 상충하는 상황에서만 충실의무가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지배주주가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경영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투자하고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주주에 대한 의무 위반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주주에 대한 의무 조항만 존재하고 별도의 책임 조항이 없는 상황에서 소송을 제기해야 하며, 미국과 달리 입증 책임이 전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혜섭 변호사는 이번 개정안이 통과되면 ‘상방이 열린 사회’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 변호사는 “지금은 모두가 의사가 되려 하고, 모두가 로스쿨을 가려고 한다. 그런데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5% 가진 총수 일가의 바지 사장이 아니라 미국처럼 진짜 경영인을 꿈꿀 수 있게 된다. 일종의 ‘중인’인 변호사, 의사가 꿈인 세상에서 진짜 회사 대표를 꿈꿀 수 있는 ‘상방이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심 변호사는 또 ‘모든 한국인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했다. 심 변호사는 “미국인들은 미국 대표 주식 애플에 투자해 1~2년 만에 두 배 수익을 거뒀다. 일본인도 닛케이에 투자했다면 최근 두 배 수익을 거뒀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올해 초 한국 대표 주식 삼성전자에 투자했다면 -20%다”라며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한국 증시 밸류에이션이 개선되면서 큰 폭으로 상승할 여력이 있다. 한국인도 자본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펀드매니저도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돈은 잘 버는데 대주주 때문에 저평가인 기업들 위주로 주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회사에 유보된 이익을 주주들에게 배당해야 하는데, 배당을 중국보다 덜 하면서 내부이익을 부당거래를 통해 빼앗아 자기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넘겨준다”며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주주환원율을 높이면 투자 재원이 줄어든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이 나왔다. 김규식 이사는 “성장에 필요한 모든 재원을 차감한 현금이 순이익이기 때문에 주주환원율을 높이면 재투자가 어렵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5년, 10년 단위로 경영 전략을 만들 능력이 안 된다고 자백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재계에서 워낙 반발이 크다 보니 3개 모두 통과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전 세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사의 주주 충실 의무는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규식 이사는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상법 제328조의3 제1항에 명확히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시장법에 몇 가지 세부 규정만 도입하면 또 신박한 구멍을 팔 것이 확실하다. 무조건 상법 제328조의3 제1항에 도입해야 한다”며 “우선순위를 두자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 법제화가 가장 시급하며, 그 다음으로 집중투표제 도입”이라고 말했다.
현재 민주당에서는 상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쓸 것을 걱정한다는 기류도 읽힌다. 거부권 행사에 대해 또 다른 소액 투자자 최 아무개 씨는 “이번 상법 개정안은 개미투자자에게는 반드시 통과돼야 하는 법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며 “보수를 지지하는 편인데,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쓴다면 영원히 보수 정치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소액주주 권리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쓰는 게 말이 되나. 국민 대부분을 약탈하는 자본시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번 기회를 잡아 코스피를 크게 올려 놓고 퇴임한다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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