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성적 향상 임무 지녀 선수단 내 역할 매우 커…“원팀 될 수 있도록 힘 보탤 것”
야구단은 '프로' 선수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름값 높고 몸값 높은 스타 선수들 사이에서 주장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어쩔 수 없이 좋은 성적이 뒷받침돼야 한다. 성적에 따라 수천만 원도 아닌 수억, 수십억 원의 몸값 격차가 생기는 상황에서 '야구 못하는 선배'의 말은 '야구 잘하는 후배'에게 권위를 잃는다. 무엇보다 주장은 최소한 시즌 내내 1군에 머무를 수 있는 선수여야 한다. 주장이 성적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기라도 하면, 1군에서 또 다른 '임시 주장'을 찾아야 하는 혼란이 생긴다. 주장이 안정적으로 주전 자리를 지키면서 야구 외적으로도 모범을 보이는 게 최선의 결과인 셈이다.
올겨울에도 양의지(37·두산 베어스), 김광현(36·SSG 랜더스), 박해민(34·LG 트윈스), 장성우(34·KT 위즈) 등 팀 전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수들이 새 주장 대열에 합류했다. 이 가운데 김광현과 장성우는 전임 주장이 은퇴하면서 바통을 이어받았고, 양의지와 박해민은 각각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투표에 따라 새로운 캡틴이 됐다. 주장을 교체한 네 구단이 모두 올 시즌 막판까지 치열하게 가을야구 순위 경쟁을 펼친 3~6위 팀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반면 우승팀 KIA 타이거즈의 나성범(35), 준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의 구자욱(31)은 내년에도 변함없이 주장으로 활약한다. 8위 한화 이글스의 채은성(34)과 9위 NC 다이노스의 박민우(31), 10위 키움 히어로즈의 송성문(28)도 내년 시즌 주장으로 연임됐다. 7위 롯데 자이언츠만 아직 주장을 확정하지 않았다.
#두산 새 주장 양의지
두산은 간판 포수 양의지를 내년 시즌 새 주장으로 선임했다. 양의지는 최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곰들의 모임' 행사에 참석해 팬들에게 직접 이 사실을 알리고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양의지는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나를 주장으로 지명해주셔서 책임감이 크다. 내년에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달라는 메시지를 벌써 강력하게 받은 것 같다"며 "(전임) 양석환이 주장 역할을 잘했기에 어깨가 무겁다. 내년엔 모두 한마음으로 '원팀'이 될 수 있게 힘을 보태고,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200%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돕고 싶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양의지는 NC 다이노스 시절 세 시즌 동안 주장을 맡은 경험이 있다. 그가 캡틴이었던 2020년 NC가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차지해 '우승 주장' 타이틀도 얻었다. 두산에서는 17시즌 만에 처음으로 주장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예전에 선수단 투표에서 주장으로 뽑힌 적이 있는데 (당시 사령탑이던) 김태형 감독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 포수라 신경 쓸 게 많았고, 그땐 나이도 어린 편이다 보니 배려해주셨던 것 같다"고 했다.
이번엔 다르다. 베테랑 내야수 김재호(39)가 은퇴하면서 양의지가 투타를 통틀어 최고참이 됐다. 함께 '두산 왕조'를 일궜던 내야수 허경민은 자유계약선수(FA)가 돼 KT 위즈로 떠났다. 공수의 핵심인 양의지의 팀 내 존재감이 더 커졌다. 양의지는 "이제 나도 정말 나이가 많아졌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아직은 젊은 선수 같은 마음으로 뛰고 있다"며 "언젠가 나도 은퇴할 날이 올 텐데, 그때까지 선배로서 제2의 김재호와 허경민이 나올 수 있도록 후배들을 많이 도와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두산은 올해 정규시즌 4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지만,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두 경기를 모두 져 5위 KT에 준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내줬다. 양의지가 쇄골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해 전력에 큰 구멍이 뚫렸다. 그는 "(내가 없어도) 팀원들이 잘해줄 거라 믿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벤치에서 지켜보면서 가슴속으로 눈물이 났다"며 "내가 앞으로 책임감을 갖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남는 시즌이었다. 양의지는 올 시즌 타율 0.314, 홈런 17개, 94타점으로 활약하고도 골든글러브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득점권 타율 0.393으로 전체 3위에 오를 만큼 '해결사' 역할을 충분히 해냈지만, 잔부상 탓에 144경기 중 119경기에 나서면서 포수 수비이닝(608⅓이닝)과 지명타자 타석(161석) 모두 후보 기준(포수 720이닝·지명타자 297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양의지는 "올해 '내가 준비한 게 이것밖에 안 됐구나. 잘못 준비했구나' 싶어 개인적으로 화도 많이 났다"며 "건강한 시즌이 있으면 아픈 시즌도 있다는 마음으로 이 아쉬움을 떨쳐버리겠다. 내년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더 독하게 마음먹겠다"고 강조했다.
#SSG 새 주장 김광현
SSG는 간판 프랜차이즈 스타 김광현에게 내년 시즌 주장 역할을 맡겼다. 올해 주장이었던 외야수 추신수가 은퇴하면서 에이스 김광현이 그 역할을 물려 받았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포지션 특성상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투수나 개인 성적 향상에 집중해야 하는 예비 FA는 주장으로 뽑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지금도 투수나 예비 FA가 주장을 맡는 사례는 쉽게 보기 어렵다. 그러나 김광현은 투수 중에서도 가장 독립된 루틴으로 생활하는 선발 투수인 데다 내년 시즌을 끝으로 SSG와의 4년 계약이 끝난다. 그런데도 이숭용 SSG 감독과 베테랑 선수들이 그를 주장으로 지목했다는 건, 김광현의 팀 내 상징성과 존재감을 실감케 한다. 실제로 SSG(전신 SK 와이번스) 구단 창단 후 투수가 주장을 맡은 건 김광현 이전에 2007년의 김원형 전 SSG 감독이 유일했다. 김광현이 역대 두 번째이자 18년 만에 처음으로 '투수 캡틴'에 오르게 됐다. 올 시즌 10개 구단 주장들 가운데 유일한 투수이기도 하다.
2007년 SK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김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두 시즌(2020~2021년)만 빼고 15시즌 내내 한 팀에서만 뛰었다. 올해까지 KBO리그 통산 170승(98패)을 올린 터라 남은 현역 생활 동안 200승 고지를 밟는 게 목표다. 그 길목에서 올해 처음으로 주장의 중책도 맡았다. 김광현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주장이 처음이라 많이 부담되지만, 감독님·코치님·프런트·선후배 그리고 팬 여러분과 잘 소통하는 주장이 되겠다"며 "팀에 대한 어떠한 질책도 달게 받겠다. 성적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열심히 뛰겠다. 랜더스 파이팅"이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김광현은 올 시즌을 무척 아쉬워했다. SSG는 올해 사상 최초로 열린 5위 타이브레이커에서 KT에 아쉽게 패해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KT와 시즌 성적(72승 2무 70패)이 같고 상대 전적도 8승 8패로 팽팽했는데, 마지막 1패 탓에 6위로 내려앉아 포스트시즌행 티켓을 놓쳤다. 김광현 자신의 성적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31경기에서 162⅓이닝을 소화하면서 12승(10패)을 올렸지만, 평균자책점이 4.93으로 높았다. 그는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평균자책점이 이렇게 좋지 않은 시즌은 처음이다. 내가 (올해 도입된) 자동 볼판정 시스템(ABS)의 '패배자'인 것 같다"며 "마지막 타이브레이커에서 보여준 모습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 다행히 후반기에는 적응이 좀 됐으니, 다음 시즌에는 절치부심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돌이켰다.
올해 통합 패권을 차지한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 장면은 김광현에게 강한 자극제가 됐다. 김광현은 "우리 팀이 우승한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KIA가 우승하는 걸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며 "그럴 때마다 늘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하며 자책을 많이 한다. 내년을 더 열심히 준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LG 새 주장 박해민
LG는 올 시즌 초반 오지환에서 김현수로 주장을 교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22시즌부터 줄곧 팀의 주장을 맡았던 오지환이 "주장직을 내려놓고 싶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이다. LG는 지난해 통합 챔피언에 올라 29년 묵은 숙원을 풀었고, 오지환은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잇달아 터트려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는 올해 정규시즌 첫 17경기에서 타율 0.250(60타수 15안타)에 그치는 부진에 빠지자 염경엽 LG 감독을 찾아가 주장 교체를 요청했다. LG 관계자는 "오지환은 스스로 주장으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왔고, 주장의 책임감으로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야구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혀 감독님이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오지환에 앞서 3년(2019~2021년) 동안 주장을 지낸 김현수가 긴급 투입돼 잔여 시즌 주장 임무를 해냈다.
올 시즌을 3위로 마친 LG는 선수단 투표를 통해 내년 시즌 새 주장을 정식으로 선출했다. LG 이적 4년 차가 된 중고참급 외야수 박해민이 동료들의 선택을 받았다. 그는 "선수들이 주장으로 뽑아줘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며 "그전에 주장이었던 오지환이나 김현수 형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잘 이어받아서 내 역할을 잘해보겠다"고 했다.
박해민은 '투수 캡틴'만큼 보기 힘든 '예비 FA 캡틴'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삼성 시절에 같은 경험을 해봤다. 첫 FA를 앞둔 2021년 삼성 주장을 역임한 뒤 2022년 LG와 4년 총액 60억 원에 FA 계약을 하고 팀을 옮겼다. 두 번째 FA 자격을 앞둔 내년에는 LG에서 다시 주장의 리더십을 발휘하게 됐다. 박해민은 "FA 직전 시즌에 주장을 맡는 게 부담되거나 신경이 쓰일 수도 있지만, 이럴 때 나 개인만 앞세워서 '내가 FA가 되니 주장을 안 하겠다'고 거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박해민도 올 시즌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보냈다. LG 이적 후 첫 시즌인 2022년에 타율 0.289, 두 번째 시즌인 2023년에 0.285를 각각 기록했는데 올해는 0.263까지 떨어졌다. 박해민은 "성적으로 보면 2019년(타율 0.239)과 올해가 가장 힘들었던 시즌이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있다"며 "올해 성적은 변명하고 싶지 않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내년 시즌을 기대하고 있다. 준비를 잘해서 올해 같은 성적은 내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KT 새 주장 장성우
KT의 주장은 구단 역사에서 '선수단 대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2019년부터 2년 동안 주장을 맡은 유한준 KT 코치와 2016~2018년, 2022~2024년 두 차례에 걸쳐 3년씩 주장 역할을 수행한 박경수는 팀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눈부신 투혼으로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진짜 리더'로 꼽혔다.
유 코치는 팀의 최고참이었던 2021년 10월 24일 키움전에서 팀의 5연패를 끊는 두 번의 헤드퍼스트슬라이딩으로 팀 분위기를 바꿨다. 당시 정규시즌 선두를 달리던 KT는 10월 22~23일 삼성과의 두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패해 4개월 만에 1위 자리를 내주고 2위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테랑의 투지에 자극 받은 KT 선수단이 키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반등해 끝내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일궜다.
박경수는 그해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몸을 날리는 호수비를 펼쳐 KT가 배출한 첫 한국시리즈 MVP로 기록됐다. 당시 3차전 수비 과정에서 종아리 근육이 파열된 그는 4차전 승리로 KT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 목발을 짚고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그라운드로 걸어 나와 후배들 품에 안겼다.
그런 박경수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자 KT는 새 주장으로 포수 장성우를 선택했다. 지난달 열린 KT 팬 페스티벌에서는 장성우가 박경수에게 직접 주장직을 넘겨받는 이취임식도 치렀다. 장성우는 "앞서 '위대한 주장' 유한준과 박경수가 있었기에 KT가 강팀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며 "두 선배의 뒤를 이어 부끄럽지 않은 주장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장성우도 박해민처럼 2025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 '예비 FA 주장'이다. 그런데도 이날 일찌감치 팬들 앞에서 "시켜만 주신다면 나는 '종신 KT맨'이 되겠다" 선언해 환호를 받았다. 장성우는 2008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2015년 5월 트레이드를 통해 KT로 이적한 뒤 선수 생활의 꽃을 피웠다. '막내 구단' KT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면서 2021년 통합 우승을 이끈 뒤 KT와 4년 총액 42억 원에 첫 번째 FA 계약도 해냈다. 이제 주장 자리까지 물려받은 그는 올해 못 이룬 '대권' 도전의 꿈과 자신의 두 번째 'FA 대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출발선에 섰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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