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탈리아의 한 언론인이 쓴 바티칸 취재기 ‘희망의 희년’ 서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밝힌 말이다. 진보냐, 보수냐를 놓고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보주의자다. 언제나 약자 편에서, 억눌린 자 편에서 말하는데 말이 늘 따뜻하면서도 힘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강자가 되어 누군가를 밟고 있는 사람까지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준다. 이것이 진보의 근원이 영성인 자의 힘일 것이다.
‘영성 없는 진보’라는 책이 있다. 영성 없는 진보? 영성에 무슨 진보와 보수가 있나, 영성은 진보와 보수 이전의 세계이고,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세계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책을 들여다본 것은 저자가 김상봉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신실한 진보주의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의 이력을 알기 때문에 아하, 인간이 없는 진보란 뜻이겠구나, 하고 넘겨짚으면서 책을 펴들었다.
책은 부정과 타도만 있지 부정 이후 함께 사는 세상의 꿈을 꾸지 못하는 차가운 진보에 보내는 메시지였지만 요즘 상황에서 오해가 없길 바란다. 진보의 힘을 빼기 위한 의도가 아니니. 오히려 김 교수는 진보가 자기 힘의 원천에 닿아 있어야 힘이 솟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진보의 원천은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믿음인데, 이성으로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 ‘영성’이라는 궁극적인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영성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체계에서 오는데 그것은 원래부터 이 땅의 정신이었다. 원효의 일심(一心)에서 이황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거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영성’이야말로 한반도 사상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나와 전체는 하나다. 인간과 하늘이 하나인 경지가 있다.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 그런 명제를 통해 김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인데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반문. 김 교수가 말한다.
“모든 물음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될 때 지속적 동기를 부여받는다. 현실의 문제는 현실의 고통이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시국선언의 힘은 분명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그 시국선언에 파괴력을 더한 것은 천주교 사제들 1466명의 시국선언이었다.
“무엇이 모두에게 좋고 무엇이 모두에게 나쁜지조차 가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앞세우는 폭력의 사람, 이어야 할 것은 싹둑 끊어버리고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은 마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사람, 자기가 무엇하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민이 맡긴 권한을 여자에게 넘겨준 사익의 허수아비….”
그 와중에 모두를 놀라게 한 한밤의 비상계엄은 사제들의 선언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가 모두의 입에 붙어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너무 어이가 없어 처음엔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짜뉴스가 아니었다.
이를 어쩌나. 나는 보수에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일하시는 어떤 아주머니의 인터뷰가 짠했다.
“힘들었던 거지, 그 자리가, 그 자리가 뭐라고, 그러면 내려와야지!”
저 심정이야말로 따뜻하면서도 힘이 있지 않은가. 궁극의 마음엔 보수도, 진보도 없다. 하늘은 진보와 보수를 품고, 영성에 보수와 진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책을 결정하고 삶을 결단해야 할 때 보수적 태도냐, 진보적 태도냐 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김 교수가 말하는 영성에, 궁극의 따뜻한 에너지에 닿아 있었으면 좋겠다. 세월이 지나가고도 남는 것은 결단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결단할 때 내가 본 하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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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